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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Sep 07. 2023

선물로 받은 내 시집

@ 선물 받은 내 시집

지난 봄은 내 생애 가장 분주했던 한철이었다. 집수리 공사를 벌여놓은 판에 팔자에도 없는 개인전 치르랴 시집 출간하랴 집안일 처리하랴, 눈앞에 닥친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느라 정신이 혼미했다. 말하자면 소낙비는 내리지, 찌개는 끓지, 빨래는 걷어야지, 전화기는 울리지, 뭐 그런 상황이었다.


마침 그 때 연락이 왔다. 한때 우리 은지화 동아리 작업실 <어울림 그림마당>을 함께 썼던 분이다. 말수가 적고 늘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계셨다. 같이 작업실을 썼다고는 하지만 이용시간이 달라 한달에 한두번 마주칠까 말까 했다. 관록있는 동양화가였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기본을 익히겠다는 담담한 자세로 꾸준히 먹선만 그리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본격적인 작품을 그리기 위해 지난해 따로 작업실을 얻어 나간 후 오래 소식이 끊겼다. 그러다가 하필 그 번잡스러운 때 연락이 온 것이다. 식사나 한번 하자고. 부득이 한가할 때 보자고 뒷날로 미뤘는데 어제가 바로 그날이 되었다.


저녁을 먹고 작업실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 중에 웬 선물 꾸러미를 내민다. 열어보니 스케치북을 비롯하여 이번에 낸 작품 화보집, 그리고 시집 하나가 나온다. 그런데ᆢ 시집이 허걱!, 올봄에 출간한 내 시집이다. 싸인 날짜를 6월 25일로 적은 걸 보니, 예전에 연락이 왔던 그 무렵이다. 묵묵히 그림에만 집중하시던 분이 내가 시집을 낸 건 어찌 알았으며, 내 시집을 내게 선물할 생각은 어찌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불립문자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진심은 말보다 말 아닌 말로 느낄 수 있을 때가 더 많은 법이니까.


헤어지기 전, 싸인할 때 쓰라며 만년필까지 덤으로 내민다. 값싼 모나미 볼펜을 쓰는 걸 보고는 이를 긍휼히 여긴 모양이다. 인상 깊은 시가 있었냐고 물으니 <모나리자>라고 답한다. 청량제를 마시듯 개운한 맛이란다. 나도 싱긋이 웃고 그 분도 싱긋이 웃는다. 세상은 혼탁한데 시나 그림 따위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겨우 세태나 조금 풍자하면서 한탄할 뿐이다.



<모나리자>


그녀의 입가에서 설핏 빠져나온 미소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탐이 난 여자는 얼른 주워 시치미를 뗐다


미소를 들고 간 곳은 성형외과였다 헐거운 데는 나사

로 조이고 넘치는 데는 절삭기로 자르고 모자란 데는 보형물로 채우고 거친 데는 그라인더로 깎아 여자의 입가에 미소를 용접했다


빛이있으라하니빛이생겼고보시기에좋았더라!


명자 신자였던 여자는 건자 희자가 되었다 가공된 미

소는 구미호처럼 재주를 넘었다 똥 싼 바지를 홀리고 세상의 간을 빼먹었다


내 미소 내놔! 내 미소 내놔!

미소를 잃고 합죽이가 된 모나리자가 상륙해 처녀귀신마냥 울부짖었다


사건번호 133호는 ‘모나리자 미소 조작 사건’이 되었다 조작된 미소가 턱에 붙어 대롱거렸지만 눈 뜬 장님이었다


뻔뻔한 미소는 아귀가 맞지 않아 자주 덜렁거렸다 조

신한 사과와 반성을 연기할 때도 가련한 빈곤 포르노를 연출할 때도 슬며시 삐져나와 입가로 미끄러졌다


가짜 미소에 홀린 아수라판의 세상

모나리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며 예수의 십자가 유언을 거리마다 게워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쥴리 쥴리 라마 사박다니



(* 내 시집을 내가 선물로 받은 기분이 묘하고 야릇하다. 30여년 만에 낸 두번째 시집이건만 출간 후 한켠에 밀쳐둔 채 제대로 정독한 적이 없다. 그 분도 머리맡에 두고 간간히 읽는다는데 내가 내 자식을 푸대접해서야 되겠나. 선물까지 받았으니 성심껏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푸근하면서도 왠지 서늘한 채찍질을 받은 느낌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내 글을 볼지 모르니 허투루 쓰기가 더욱 어려울 듯하다.)


#장세현시집ㅡ부끄럽지만숨을곳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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