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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 자객 Sep 16. 2023

달루에 걸린 직지

은지화 미술 동아리


작년 말부터 은지화를 배우는 분이 있다. 2002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경 작가님. 소설 쓰는 게 본업이지만 그림 그릴 때가 더 행복하고 그림 속에서 소설적 영감을 얻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오랫동안 민화를 그려서 전시회까지 여신 분인데 우연히 은지화를 보고 매료되어 배우게 되었다. 거주지가 대전이라 수강에 어려움이 많지만 워낙 열의가 강하고 의욕이 넘쳐서 기초를 익히고 전문가 과정에 들어섰다.

"이번에 소설집을 출간하는데 표지작을 그려주실 수 있나요?"

어느 날 이런 부탁을 받고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드디어 책이 나왔다. 대표작은 <달루에 걸린 직지>다. 이 작품으로 제10회 직지소설문학상을 받았다.


ㅡ버스는 이백 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 근처에 멈추어 섰다ᆢ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의 첫구절에 영감을 받아 표지작을 그렸다. 커다란 나무둥치를 뼈대로 삼고, 왼쪽 위는 현세의 인간이 사는 마을, 오른쪽 아래는 흥덕사 절의 이미지를 산봉우리 속에 아늑하게 파묻어놓았다. 사바세계를 관조하듯 비추는 초승달은 절반을 뚝 잘라놓았다. 글의 내용이 파격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작품은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에 비견될 수 있다.


ㅡ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절창으로 회자되는 대목이다. 이 아름다운 시적 묘사들이 빛날 수 있는 건 암시적인 장치들 때문이다.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그리고 동행하던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허생원과 같은 왼손잡이라는 사실! <달루에 걸린 직지> 역시 이효석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암시적 장치가 마지막 반전을 향해 치닫는다.  


ㅡ 우석이가 끔찍하게 널 생각해서 그랬을 거야. 형제처럼 자란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니 병든 우석이를 그만 힘들게 해!

나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로 제 갈 길을 가자며 선전포고를 쏟아낸 수연이가 점점 나에게 멀어져갔다. 그녀의 검은 그림자가 빛 속으로 사라졌다. 투명인간처럼 완전히 사라졌다.


더 이상의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작품 소개는 여기까지만ᆢ! 궁금하시다면 소설을 직접 펼쳐봐도 좋겠다.


(* 직지문학상ㅡ 역사적으로 인쇄술은 그 나라나 민족의 문화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고려시대 청주 흥덕사에서 발행한 직지심경은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은 우리나라에 없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뒤 아직까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상·하 2권으로 간행됐으나, 현재 하권만 프랑스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충북도에서 한때 상권을 찾으려는 노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직지심경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 직지문학상이다. 충청권을대표하는 문학 공모상을 꼽으라면 단연 이 상이 될 것이다.)


https://cafe.naver.com/eunjihwa

은지화 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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