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맏이

눈쌓인 길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웠다.

by 재섭이네수산

배우고 싶던 8살.

동무들은 학교로 떠나갔고

나만 남았다.

둥근 지구에 덩그러니.



해가 머리맡에 떠오르면

동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오늘 뭐 배웠어?

난 끊임없이 묻고,

친절한 동무들은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나는 살림 밑천 큰 딸이라

무엇이든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놀고 싶은 것도 참고

배우고 싶은 것도 참으며

희생을 양식 삼았더니

동생들은 꺾다리

나는 여전히 땅꼬마.



키작은 내가 맏이.​

그리고 까막눈.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느 집 마당에 서서

내 손에 연필 쥐어주며

다 닳을 때면 돌아온다 하셨는데...​

종이 한 장, 신문 한 장, 달력 한 장,

연필 다 닳게 쓸 무엇이 없다.



꽃망울 터트리듯 울음 터지던 봄날이었다.

짠내나는 물방울은 땀방울일까 눈물방울일까?

숨통 막히게 찌는 여름이 지났다.

애타는 마음 알 길 없는 과실들은 탐스럽게 가을을 열고,

희망으로 졸졸 흐르던 내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은 겨울.

돌아오신다던 약조만 지구 안에 덩그러니.



나는 까막눈.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연필을 깎고

버려진 이면지를 찾아내

"보고픈 엄마에게...

저는 잘 있어요.

꼭 데리러 돌아와주세요."

편지를 쓰고

집주소를 쓰고

우체통을 찾아

넣었다.

그리고 우체통의 답신을 기다렸다.



겨울의 끝자락, 받아든 답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

버스도 끊겼지만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엄마 손을 잡고

호오~ 따뜻한 바람을 입으로 불어내며

서로의 언 손을 녹이려 애쓰는 이 순간

우리는 서로의 언 마음까지도 녹여냈다.



나는 키작은 맏이.

나는 글쓰는 맏이.

희생을 아는 맏이.

눈쌓인 길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우고

이제 온기를 불어 자식들의 언 손을 녹여주는 어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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