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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아무리 급해도 문은 닫고 하자>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17일 자

by 재섭이네수산

오늘 우리 팀이 일할 곳은 눈앞으로 강이 펼쳐진 리모델링 건물이었다.

"이야~ 오늘은 좀 일할 맛 나겠는데요."

떠벌리기 좋아하는 계장님이 분위기를 띄웠다. 필요한 공구들과 재료들을 옮기고 잠깐 허리를 펴며 강을 바라보았다. 다들 내일이면 퇴원하는 팀장님 생각이 난다고 했다.

"여기 주인 사모님께서 팀장님이 보고 계약한 건데 그분 안 오시느냐고 계속 물어보셔서 아주 진땀 뺐네요."

"아이고 팀장님~"

"퇴원하고 바로 지방으로 내려가신다고 하니 이제는 만날 수 없는 먼 타인처럼 느껴지네요."

"팀장님, 진짜 좋은 분이셨는데."

저마다 그리움에 젖은 한 마디씩 했다. 그러다 계장님께서

"팀장님 들으셨죠?"

그러시는 거다. 아까부터 계장님께서는 현장을 보고 싶다는 팀장님의 부탁으로 팀장님과 영상 통화 중이셨다고 한다. 가시는 날까지 현장에 대한 애정이 참 남다른 팀장님이시다.

"고맙습니다, 모두들. 저 감동받았어요. 가기 전에 회식 한 번 합시다."

밝은 목소리의 팀장님과 우리들은 아쉬움 가득한 인사를 나눴다.




옥상에 잔뜩 껴있는 얼음부터 제거하기로 했을 때였다.

"소영 씨~"

커피가 놓인 쟁반을 들고 소영을 부르는 것은 놀랍게도 옛날 중학교 국어 선생님이셨다.

"어 선생님. 선생님이 어떻게?"

"여기가 우리 집이야. 시 쓰라니까 기술 배웠구나."

이 나라가 그렇게 좁은 곳은 아닐 텐데 인연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이어지나 보다. 이 분은 내가 중학교 때 과제로 써낸 시를 보시고 내게 재능이 있다며 나를 무척 아껴주셨던 선생님이셨는데, 나는 지금 시와는 전혀 거리가 먼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글에 대한 갈증이 나라고 왜 없겠는가? 선생님께서 내려주신 커피를 마시며 잠깐이지만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름이 조금 잊히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짬짬이 시간 내서 글을 써봐."

국어 선생님은 여전히 나를 높이 평가하시며 글을 쓰라는 독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니 참 글을 쓰고 싶다.




점심시간에 전화가 한통 왔다. 어제 만났던 한유리 주무관님이셨다. 맞다. 나는 어제 한유리 주무관님의 남자친구의 바람을 목격하고 고민 끝에 '혹시 모르니 남자친구분 다른 사람 만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라고 넌지시 알려드렀었다. 남의 인생에 함부로 껴드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지만, 유리 씨는 다행히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밤 뜻하지 않게 한유리 주무관님과 맛있는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러면서 원래 남자친구와 보려고 했다는 영화 티켓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거절을 하려 했으나 그 복잡할 마음을 생각하니 그냥 내가 받아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 티켓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우연히 생기니까 은근히 누구와 함께 가나 고민이 되었다. 지금 나는 현수와 심하게 싸운 뒤라 먼저 전화를 걸어 아무렇지 않은 척 영화 보러 가자는 얘기를 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티켓을 핑계로 현수와 화해를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직 화가 나 있는지 현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매번 현수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지 내가 현수 집으로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도 서프라이즈를 한 번 해볼까? 그러면 현수가 감동해서 화해가 좀 더 빠르게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나는 거금을 들여 비싼 택시를 잡아타고 현수네 집으로 향했다.




현수네 집 앞으로 와서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받지를 않았다. 그럼 나도 저번에 현수처럼 집 앞에서 기다려주는 서프라이즈를 해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현수네 집으로 갔다.


벨을 누르려는데 무슨 일인지 현관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무슨 일일까? 전화를 받지 않는 현수, 열려 있는 문. 혹시 도둑이라도 든 것일까? 어쩌면 현수가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119에 전화를 걸어야 하나 순간 당황을 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 성급한 판단으로 난처한 일 만들면 안 된다. 어떻게 하나 갈등하다 조심히 들어가 살펴보기로 했다. 강도가 들었다면 입구에 발자국이라도 있을 테니 나는 형사라도 된 것처럼 조심조심 한 발씩 입구에 들어서면서 조용히 천천히 바닥을 살펴보았으나 다행인지 그런 건 없었다. 그때, 순간 내가 강도가 될 뻔했다. 현수가 거실에 쓰러져 있긴 했다. 다른 여자와 함께 포개져서 말이다. 신음소리를 내던 여자가 먼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는데, 다애였다.

"다음엔 아무리 급해도 현관문단속을 잘하고 하자. 그리고 여러모로 고맙다, 다애야."

"누.. 누나."

"문은 제가 잘 닫고 갈 테니 하던 일 쭉~ 계속~ 하세요."

나는 서둘러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행여나 현수가 따라올까 봐 열나게 뛰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무언지 모를 이 해방감. 이 영화 티켓이 요물인가 보다. 가지고 있으면 바람피운 남자친구 잡아내는 요물. 이거 가져가서 한인규 선배에게 한 번 줘봐야겠다. 어떻게 되나.




에필로그


항상 술이 문제라고 한다. 현수는 나와 싸운 뒤 하소연을 하러 다애를 찾아갔다가 함께 술을 마셨고, 그러다 눈이 맞아서 그렇게 그렇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왜 자신의 잘못을 술한테 뭐라고 하는 거냐? 술은 문제가 없다. 그걸 이기지 못할 만큼 마신 인간이 문제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한 팀장님과 지형 씨가 일제히 말했다. 술을 마시지 말든지 술을 마셔도 안주를 조금 먹든지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제발 자기들을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글쎄. 그러고 싶지만 항상 술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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