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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월 1일의 연인'<다시 쓰는 결혼 일기>

2025년 1월 1일 혹은 2005년 1월 1일

by 재섭이네수산

그다지 일찍은 아닌 새벽 5시 20분이 오늘 내가 정한 기상 시간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1분마다 울리는 알람의 채근에 마지못해 어거지로 무겁디 무거운 몸띵이를 일으켜 세웠다. 만약 오늘이 새해 첫날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30분 일찍 일어나기 미션은,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얄팍하고, 포기해 버리기를 매우 좋아하며, 본능에게로의 이끌림이 얼마나 강렬한 자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나는... 일어났으니까.




오늘부터는 새 사람으로 살아보고자 나를 치장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래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정식으로 거울과 마주 보고 앉아보았다. 앉자마자 나는, 연말을 맞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음주 대신 머리를 볶았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스스로에게 박수까지 쳐가며 격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년보다 높은 기온이라 낮 기온은 영상 7도"라는 뉴스를 들으며 핫쵸코 미떼 한 포에 커피 알갱이 한 포를 넣어 자체 제작한 내겐 필요 없는 과한 칼로리의 모카라떼를 천천히 음미하며, 오랫동안 옆 방 방구석에 처박아놓은 러닝머신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러자 먼지 귀신들이 머리 풀고 재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을 목도하였고, 이내 나는 매우 경악하며 모카라떼 다 마시고 손댈 걸 하고 몹시도 늦은 후회를 하였다.




아침 8시쯤 되니 지인들에게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이들 중 나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참으로 서두가 길었다. 이제 내가 이 러닝머신에 선 이유를 공개해야겠다.

"2025년 1월 1일에 연인 만들기 프로젝트"

나는 오늘 소개팅을 하여 남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할 것이고, 올해 12월 31일에는 365일을 기념할 것이며, 400일 기념일 즈음 되는 2026년 2월 4일 입춘을 진정한 나의 봄으로 만들 것이다. 즉, 2026년 2월 4일 입춘에 결혼을 할 것이란 말이다~! "2026년 2월 4일 입춘, 만난 지 400일 기념 결혼 프로젝트"가 나의 새해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내 옆칸을 채워줄 남편 역을 꼭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목표물을 향해 정조준하는 그 시간 오전 11시가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뜻밖의 전화가 한 통 왔다. 내가 일하는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남자 후배였는데, 급매로 나에게 딱 맞는 좋은 집이 나왔다고 오늘 꼭 보아야 한다고 어찌나 강요를 하는지, 11시 소개팅이 끝나는 대로 만나자고 간신히 달래 놓았다.




오전 10시 10분, 후배의 전화 때문에 조금 지체되는 듯해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새해라 그런지 택시조차 잘 잡히지 않았다. 그때 낯익은 차 한 대가 내 앞에 와 섰다.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는 남자 선배였다.

"어서 타. 나도 약속이 있어서 나가는 길이야"라며 나를 태워주는데, '아~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이로구나' 느낌이 좋았다. "아이고 고마워요 선배. 선배가 도움이 되는 날도 다 있네요!"라며 차를 얻어 탔는데, 이 선배,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라 그런지 꽤나 때 빼고 광을 낸다고 냈는데, 어쩌나... 여전히 그 패션감각은 많이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선배가 나의 은인이기에 늘 하던 지적질을 생략하기로 했다.




드디어 나는 우여곡절 끝에 약속 장소에 도착하였다. 두근거리는 가슴 진정시키며 손목을 더듬어본다. 시곗바늘은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절박해 보이지도 않는 아주 적절한 시간 같은 느낌이었다. ^^ 속으로는 오늘의 목표물이 정말 정말 내 이상형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지만 티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만나는 이곳, 나완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을까 아직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곳이다.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어주는 것이 모양새가 좋을 것 같아서 결정하였으니, 그래, 그걸로 만족하자. 서로 마음이 어긋날 수 없는 그 쐐기를 박는 순간이 지났다는 확신이 설 때 나의 본 고장 국밥집으로 가면 되지 뭐~! ^^




나의 망설임이 길었는지 이미 우리가 만나기로 한 그 자리에 그가 먼저 와있었다. 앗~ 누가 보아도 첫눈에 반할 만큼 눈에 띄게 잘생겼다. 그래서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단정한 차림새가 인상적이었는데, 다행히 그것은 내가 원한 이상형과 일치했다. 더 내 행동이 자연스러울 수 없게끔 부담이 내 목을 졸라왔다. 나는 편한 사람이 좋은데...


사실 나는 외모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주선자에게도 다른 건 괜찮고 위트가 있고 나와 관심사가 같았으면 좋겠다는 요구 조건을 먼저 일러주었는데, 이상하게 우리의 관심사는 전혀 맞지를 않았고, 우리는 어색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서로 별 말이 없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계획은 무너지고 마는가? 나는 그때부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그를 웃겨주기 시작했다. 말은 없지만 웃음은 헤픈 그 사람이 스테이크까지 다 썰고 디저트를 먹는 순간 내게 사실을 직고 했다.

"사실 오늘 나오기로 한 친구가 따로 있었어요. 그 친구가 갑자기 배탈이 나는 바람에 오늘 친구들 중 유일하게 시간이 있는 제가 대타로 나오게 되었거든요. 죄송해요.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 이렇게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애프터신청은 없을 거라는 예고와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웃으며 서로 좋은 만남이었다 하기로 하고 안녕을 고했다.


이렇게도 계획은 무심하고 허무하게 망쳐지고 말았다.




허탈한 마음 달래며 집을 알아봐 주기로 한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가 일하고 있는 학교 구내식당으로 일단 와달라고 해서 나는 멀지 않은 길이기에 자동 퇴짜 맞은 기념으로 코를 훌쩍이며 걸어서 도착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내 앞에 학교 신문이 한 부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신문을 주우려고 하는 찰나 캔커피 하나가 내 발 앞으로 또르르르 굴러오고 있었다. 앗~ 나는 신문을 주은 반대 손으로 캔커피도 주워 들고, 내 앞으로 다가온 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주려고 "여기요~" 하고 일어서는데, 잠깐 눈이 부셨다.

"선배 거예요. 많이 추웠나 봐요." 후배 녀석의 멘트와 그 자태가 잠깐 멋있어 보였던 것은 분명, 나의 계획이 망쳐져 버린 현실에 타격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커피 한잔 마시고 추운 겨울 나를 맞이해 줄 새로운 집이 될지도 모르는 그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은 앞으로 있을 나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되어주는 터전으로 낙점되었다.




그날 나는 "2025년 1월 1일에 연인 만들기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간 줄 알았으나, 훗날 나는 이 날 만난 어떤 사람과 "2026년 2월 4일 입춘, 만난 지 400일 기념 결혼 프로젝트"를 성공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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