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계약한 작업에 착수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일과를 시작한 지 불과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작업 중단"이라는 큰소리의 공고가 울려퍼졌다. 무슨 일일까? 일단 지시대로 우리는 각자 진행시키던 일만 마무리 짓고, 자기 자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저 멀리 우리 팀 팀장님이 화가 잔뜩 나 사무실 직원과 통화하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며칠 전에 시켜놓은 단열재 화스너가 말썽이었다. 우리가 시킨 건 50mm였는데 실제로 우리에게 배달 된 것은 70mm였다. 아~ 20mm 차이여! 그 미세한 차이로 벽을 뚫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으니, 우리 팀은 졸지에 손발이 묶이고 말았다. 사무실에서 발주를 할 때 치수를 실수한 것 같다. 잘못 주문한 물건 반품 처리하고 필요한 자재를 다시 받기까지 빨라야 오후 4시라고 했다. 이것은 곧 오늘 하루는 공을 치고 만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약속한 7일 중 1일이 그냥 날라가버리는 사태였으니까. 안 그래도 빠듯한 일정이라 오늘도 늦게까지 일을 할 작정이었는데, 팀장의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건 우리 모두 충분히 이해하기에 우리끼리 내일부터 야근이라는 결의안을 눈빛으로 발사하고,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종의 눈빛 교환을 서로에게 보냈다.
내일 할 일을 당겨서 미리 하고 또 해도 오전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이른 점심을 먹고, 작업장을 정리해야 하는 팀장님과 물건이 오면 받아야 하는 나만 남고 다른 분들은 그냥 퇴근을 하기로 하였다. 암묵적으로 내일부터는 야근이니 준비를 단단히 하자는 비장한 표정으로 우리는 인사를 나눴다.
한인규 팀장님. 그와 나는 1년 선후배 사이다.
"담배 땡기는 얼굴이네요. 한 대 줄까?"
"끊었어. 그나저나 어제 데이트는 잘 됐어?"
둘만 남으면 저절로 절친모드가 가동된다.
"잘됐으면 내가 이러고 가만히 있겠어? 마구 떠들어대지."
"그렇긴 하네. 하~ 이씨. 내가 70원이라고 썼어야 됐는데! 최미영! 아니 근데 어떻게 가격을 치수로 보냐?"
"아~ ㅎㅎㅎ 그니까 누가 미영 씨랑 사귀래? 선배 여자친구만 아니었으면 우리 전부 욕 쎄리 박았지!"
그리고 우리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동네친구이기도 한 팀장님과 나는 오후 3시쯤 도착한 화스너를 받고, 정리 후 함께 이른 퇴근을 하고 있었다.
"인규 선배, 이제 이렇게 같이 출퇴근할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라고 하는데 갑자기 내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와 대화가 끊겼다. 나는 얼른 수신 거절을 하며 다시 선배이자 팀장님에게 나의 이사 사실을 알렸다.
"이사를 간다고?"
근데 금세 또 내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울려 우리는 더이상의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내 문자를 확인한 나는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까아악~"
"왜 그래?"
"까인 게 아니었어!"
이 문자의 주인공은어제 만난 대타의 그였고,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 내게 문자를 보내 정식 데이트를 요청하고있었다. 오. 마이. 갓! 화스너가 아니었다면 빠듯한 일정 때문에 오늘도 야근이었을 텐데, 화스너 덕에 일찍 퇴근한 것이 내게 이토록 큰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이 연애는 하늘이 돕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선배를 재촉해 재빠르게 집에 도착해서 날쌔게 작업복을 벗어던지고 최대한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가까운 약속 장소로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아~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유효했다.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 오늘은 그를 두 번째 만나는 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어색한 사이였던 그가 기다려졌다기보다 계획한 바를 이룰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주는 흥분이었다고 봐야 옳았다. 그렇다면 이건 뭔가 주객이 전도된 흥분이 아닐까? ㅎㅎ 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런 내 생각에 의아함을 품기도 전에 나는 대뜸 그의 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만난 그에게 씩씩하게 90도 폴더 인사를 했다. 오늘은 스웨터를 장착한 잘생긴 그가 저항 없이 빵 터졌다. 그린라이트! ㅎㅎ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지형이라고 합니다."
"윤소영, 인사 올립니다."
"어제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상하게 소영 씨의 말투가 계속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오랜만에 크게 웃었거든요. 그래서 용기를 내 제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선자인 소영 씨 친구분께 연락처를 물었어요."
이렇게 우리의 하루 늦은 애프터 신청은 재점화되었고, 전적으로 내가 웃겨주는 데이트가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두어 시간 만남을 가진 뒤 얼굴에 주름살 하나 늘리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집 대문 손잡이에 꽃 한 다발이 걸려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손편지와 함께 말이다. 이 뜬금포는 뭘까?
"날달걀 같은 얼굴로 날도독질을 좋아하는 날 닮은 선배의 생일을 축하드려요."라는 뜬금없는 생일 축하카드는 누구의 작품이란 말인가? 맨 아래 적힌 <그대만의 날다람쥐고픈 전현수로부터>를 확인하자마자 한숨이 푹 쉬어졌다. 아~ 이 키만 큰 싱거운 노무스키.
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생일 아니야. 누가 그래?"
"주민번호 봤는데. 1월 2일 아녜요?"
"11월 2일이야. 아무튼 두 달 늦게나마 생일 축하 고마워."
현수는 생김새는 날렵한데 이렇게 늘 한 발 늦었다. 이번엔 많이 늦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웃을 때 예쁜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으나 딱한 느림보 이 녀석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라게 해주려고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망했네요."
그러면서 담벼락 뒤에서 그 애가 짜잔~ 하고 나타났다.
"물어보지 그랬어!"
"그러면 서프라이즈가 아니잖아요. "
"그렇지. 근데 밥은 먹었어?"
"아니요."
"어머 배고프겠다. 어쩐다, 나는 먹었거든. ^^ 어서 너네 집에 가서 밥 먹고 발닦고 잠이나 자렴. 하여간 꽃은 고맙다."
현수가 아무리 같이 먹자 매달려도 배가 부른 나는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 그토록 허무하게 현수의 서프라이즈 뒷북 쇼는 끝이 났다.
이렇듯 새해부터 뭔가, 꼬이는 듯 잘 풀리는 일상이 지루한 듯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에필로그.
훗날 우리 남편은 이 날을떠올리며 내게 오기까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펼쳐놓았는데, 나는 멋도 모르고 혼자 즐거웠던 나와 그를 생각하며 미안하고 고마워서 코끝이 찡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