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색 조끼는 잘 디자인 된 것 같습니다만.

당신은 정령을 만났습니까?

by 재섭이네수산

"베이지색은 없어요?"

어릴 때 그 전쟁통에서도 '생긴 게 부티난다'소리만 들으며 자랐는데, 내 훤칠한 인물도 이 형광색 조끼는 영 ~못 살리겠다. 이건 정말 누가 만들었는지 패션센스가 영~


"여기는요 예, 백화점이 아니고요 예, 공공근로사업장이에요, 아저씨! 안 입을 거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던지요 예~"


저렇게 소리를 빽 지르며 윽박지르다니. 노가다 십장은 다 저런가보지? 그럼 이제 나의 꿈은 노가다 십장으로 해야겠다. 남은 인생은 저렇게 큰소리치며 살아보고 싶다.


그렇다. 나는 이제 백화점 vip 고객이 아니라 오늘 하루 이 문화원에 풀을 베러 온 수많은 공공근로자 중 1인이었다. 큰 소리 좀 쳐보며 살고 싶었지! 그래서 되지도 않을 국회의원 해보겠다는 늦바람에 세 번이나 도전했다 모조리 고배를 마셨고, 그동안 쏟아부은 돈이 얼만지, 결국 세 번째 도전에 집을 다 말아먹고, 마침내 집도 잃고 가족도 잃었다.


애들과 아내는 내 꼴 보기 싫다고 친정으로 가버렸는데, 엥? 엄마랑 친정에 간 아들 녀석이... 나와 같은 형광색 조끼를 입고 나에게 다가오는 저 현상은 뭐지? 그리움에 사무쳐 환영으로나마 자식을 만나고자 하는 깊고 깊은 나의 부성애?


"아버지?"

아~ 진짜 아들이었다.

"의외로 잘 어울리시네, 형광색."

고등학생이 되어선지 덩치도 좋고 전보다 안색도 좋아보였다. 어깨를 툭치며

"넌 뭐 다를 것 같냐?"

농을 쳤다.

"누굴 닮았겠어요? 전 뭐든 잘 어울려요."

"그렇지?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어딜 가나 내가 빠지는 인물이 아니었다. 나한테 좀 고맙냐?"

"아~ 엄마. 전 엄마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어서, 엄마한테 감사하죠."

"유머감각은 날 닮았구나."

"아~ 그건 할머니. 외 할머니."

그러다 문득 우리가 나눈 대화가 꽤나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세번 대화가 왔다갔다하면 저녀석, 항상 방으로 튀어 들어가버렸었는데... 다 잃고 망해서 좋은 게 없던 인생에 망해서 좋은 게 하나 생겨버린 오늘이었다. 자식과의 우연한 만남, 긴 대화. 웃음....


그리고 우리는 곧장 예초로, 조경으로 불려가 열심히 노동을 하였다. 아들은 대학 등록금을 위한 아르바이트, 나는 파산을 하여 다른 직장을 얻을 수 없었기에. 아들과 나는 이런 각자의 이유로 공공근로사업장에서 감격의 조우를 하게 된 것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어 우리는 지급받은 도시락을 가지고 아닌 척하며 서로를 찾았고, 둘다 피지컬이 좋아서 돋보이는 스타일이다 보니 힐끗 보고도 한 눈에 서로를 찾아냈다. 나, 망한 사람인데 자뻑정도는 괜찮잖아~


아들과 나는 한 사람은 더 앉아도 될법한 자리를 두고 건너 앉아서는 별다른 대화 없이, 아니 대화를 할 수가 없을만큼 허기져서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너 연근 안 먹지 않았냐?"

"아버지는 고기 없으면 밥 안 드시지 않았어요?"

우리는 말없이 몇 초를 서로 눈맞춤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히 먹자."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노란색 믹스 커피가 요샌, 속된 말로 최애다. 믹스커피를 뜯어 종이컵에 따르고 물을 붓고 나면 꼭 저을 티스푼이 없지 않은가? 그럴 땐 믹스 커피 껍데기를 한 번 접어 스푼 삼아 커피를 젓는 것이 국룰! 잘 녹은 믹스커피 한모금 쫙 들이킨 다음 크햐~ 맛있다~. 세상이 다 내 것인 것만 같았다.


그렇다. 수억 들여 과외 선생까지 붙여가며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던 그 일을, 몇 시간의 노동이 해내고야 말았다. 노동이 우리를 철들게 했다.


오늘 우리에게 정해진 일이 끝이 났다. 오후 5시였다. 다들 떠나고 잘 정리 된 풀밭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남아있었다. 아들과 나는 약속한 적도 없는데 점심을 먹었던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어김없이 몇 분간 정적이 흐르다 아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역시 젊음의 패기! 아 생각해보니 아깝다. 내가 먼저 말 걸어서 연륜의 노련미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

"처음으로, 아버지가 파산해서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데 앗, 차오르는 눈물....

"해양소년단 그 하얀 색 옷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그 선망의 눈빛.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첫번째 선거 실패 때 그 옷, 팔았잖아요, 당근에.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시죠? 아버지가 진짜 싫었어. 두번째 실패에는 피아노, 김치냉장고, 건조기 뭐 식기들을 다 가져가더만요. 그땐 울기보다 아버지를 원망했죠 뭐. 세번째 실패에는 그냥 우리가 걸어나왔잖아요. 다 두고 우리 식구들만 나가면 된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버지 원망하면서 몇 달을 보냈거든요. 그런데 오늘 저 멀리서 아버지가 형광색조끼 입은 모습을 봤을 때 뭔가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나도 그걸 입고 있으니까 이제 뭔가 동등해진 느낌? 대화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산 같던 아버지가 같은 바닥에 서있는 느낌? 같은 높이니까 다가가기도 좋고. 뭐 나한테 기대 같은 것도 안 할테고. "

아들이 복받치는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그걸 바라보면 내가 먼저 울 것 같아 체면이 있지 그럴 순 없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와 마신 믹스커피의 맛이 너무 달더라고요. 그래선가? 처음으로, 아버지가 파산해서 행복했어요. 감사해요 아버지."


이 무슨 판타지란 말인가? 내 아들이 파산한 아버지에게 원망 대신 감사라니.....

"아무래도 아침에 만난 그 50대 여성이 진짜 정령이었나보다. 너한테 감사하다란 소릴 다 듣고."

아들의 듬직한 어깨에 괜히 한 번 쨉을 날려보았다. 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정령 타령에도 불구하고도 주책맞게 눈물을 흘렸다. 갱년긴가....ㅜㅜ

그런데 곧 웃음이 났다. 아들이 더 큰소리로 울고 있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