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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누가 악역일까?>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9일자

by 재섭이네수산

살다 보니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같은 일에도 누구의 관점이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고, 잘한 사람 잘못한 사람도 달라지는 것을 곧잘 보곤 했다. 내가 피해자였는데 어느새 가해자가 되어있었던 경험도 있으니, 사람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이라는 것은 힘이 없다. 연애라는 것도 어차피 사람과의 관계이다 보니 때때로 서로에게 악역이 되기도 하는데, 물론 나 또한 심하게 악역이었던 적이 있었다. 오늘은 그 얘기를 써볼까 한다.




어느 날, 다애가 울면서 내게 말했다. 이제 그만 현수를 놓아달라고 말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내가 언제 현수를 붙잡았다는 말이지?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재차 물었다. 다애의 갑작스러운 이 억지스러운 주장을 이해하려면 다애의 이야기를 더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다애는 현수와 대학 동기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현수를 짝사랑하였다. 그러나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고, 현수가 눈치도 채지 못해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괴로워하는 다애에게 접근한 한 남자가 있었는데 처음엔 그렇게도 잘해주더니 어느 날부터 돌변해서 못된 짓을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것을 눈치챈 현수가 그 남자를 찾아가 혼내주고 다애를 구해주었는데, 그 일로 다애가 "정말로 내가 좋아한 것은 현수 너였어"라며 갑작스러운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현수는 오랫동안 자신을 짝사랑하다 못 된 놈에게 걸려들어 힘들어하는 다애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척 고민하였다고 한다.




다애가 현수에게 고백을 하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이유는 놀랍게도 나 때문이었다고 한다. 현수는 대학 친구들을 만나면 맨 정신이거나 술에 취했거나 늘 만남의 마지막에 입버릇처럼 "아~ 나는 누나에게 가야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 그 누나가 바로 나다. 다애는 그런 현수가 밉기도 하고 딱하기도 해서 '말하지도 못하는 마음을 그만 두라'고 몇 번을 충고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번번이 현수가 "시작도 안 했는데 뭘 그만두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른 충고는 거둬라."라고 했단다. 다애의 관점에서 현수는 미련한 사람이고, 현수의 관점에서 다애는 지나친 참견쟁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어장 관리하는 나쁜 누나? 아무튼, 지나고 보니 그럴 때면 현수는 늘 내게 전화를 걸었었던 것 같다. "누나, 뭐 하고 있었어요?"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 말은 보고 싶다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애의 모든 얘기를 듣고 가만히 다애 편에서 생각을 해보니, 다애 눈엔 내가 꼬리가 한 9개는 달린 여우로 보였던 모양새다. 이제 그만 홀리고 놔주라고 하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나완 엄청 안 어울리는 이미지이지만 다애 눈에는 내가 내 스스로 깨달은 것 이상으로 나쁜 년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생각의 끝에 다애 입장에선 내가 악역일 수밖에 없겠다 인정!




그러나 이 사실도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보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뜬금없이 내게 찾아와 "놓아줘 " 하는 다애가 자기 욕심이 지나쳐 나를 괴롭히고,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내게 그 마음을 폭로하고 간 경솔한 악역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제3자인 다애로 인해 당사자인 현수와 내가 원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져 버렸으니까 말이다. 현수가 내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버린 이 그림, 아무리 여러 번 다애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 해도 나는 나인지라, 다른 사람으로 인해 우리 사이가 강제로 변화되는 것만 같은 이 그림이 몹시 씁쓸했다. 그래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이 날의 일을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아무 달라질 게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리어 나는 이 날 이후로 현수도 내가 결혼할 수 있는 수컷임을 자각하게 되어버렸다.




에필로그


현수에게 있어 나는 5월의 햇살이라나?

그리고 내가 만약 지구라면 현수는 지구의 단 하나뿐인 자연적인 위성 달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마음을 알아버린 그날 현수는 한 겨울에 동해 바다로 떠났다.

며칠 걸릴 예정이니 당분간 자기를 찾지 말아 달라는 문자를 남기고 말이다.

정말 나는 꼬리 9개는 달린 여우였을까?

하루 이틀 그 애의 잠적 기간이 길어질수록 슬슬 걱정이 똬리 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상스럽게도 나는 그 애가 매일 같이 내게 건네주던 캔커피가 고파왔다.

내게 크지 않았던 그 애의 존재가 그 애의 부재로 인해 커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달이 지구를 떠나다니, 그 애가 없는 하루하루가 갈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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