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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남자의 향기>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10일

by 재섭이네수산

겨우 날짜를 맞춰서 공사를 끝냈다. 이제 비계를 철거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항상 사고는 방심할 때 나기 마련이다. 그냥 나는 저 멀리 걸어오는 분이 누구인지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현장을 방문한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팀장님이 깜짝 놀라며 내게 달려와 나를 돌려세웠다. 그때 팀장님의 등으로 묵직한 클립이 떨어졌다. 놀랄 새도 없이.

"괜찮지?"

클립을 맞은 팀장님이 도리어 나를 걱정했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정신이 없었다.

"팀장님, 어떡해~! 119, 119"

다른 직원분들의 호들갑에

"난 괜찮아요. 내가 걸어서 갈게요."

팀장님이 직접 진정을 시키고 다시 나를 보며

"너 안 다쳤으면 됐다."

그러고 저만치 걸어갔다. 그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소영 씨, 빨리 따라가봐."

겨울의 두꺼운 옷을 뚫고 팀장님의 등에 빨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응급실이었다. 혼자 걸어서 갔지만 팀장님은 응급 환자였다. 다행히 등을 수십 바늘 꿰매는 정도로 끝이 났다는 설명을 듣고, 회복실에 있는 팀장님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믿는 신이 있다면 이 순간 기도해야 한다. 두 손 모으고 말이다.




"그냥 두지. 왜...."

"너 다치는 거 보느니 내가 다치는 게 낫지. 순간, 내가 죽어도 너 다치는 건 못 보겠더라고. 얼마나 징징댈까? 싶어서."

애써 웃었지만 그새 하얗게 질리고 핼쑥해진 팀장님의 얼굴에 나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울지 마라 소영아. 나 지금 등이 찢어졌거든. 너 울면 내 가슴도 찢어진다."


팀장님은 그런 분이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높은 데서 하는 일이라 위험할 때가 많기 때문에 팀원들이 다치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하며, 여러분들이 다치면 자기 가슴이 찢어지니 늘 조심해 달라고 신신 당부하고, 혹여라도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 안아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다 나을 때까지 몸조리 잘하라고 뒤처리 싹 해주시는 분이 팀장님이셨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아무리 더러워도 직원들은 다 그를 믿고 따랐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병간호를 자처했으나 그러면 두 사람이 빠지는 셈이 되니까 팀원들 힘들다고 현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오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녁이 되어 선약이 있었던 터라 나는 외출을 해야만 했다. 상대는 지형 씨였다.

"오랜만이에요."

알리 없는 그에게까지 내 아픈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종이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선물이에요."

"고맙습니다. 집에 가서 열어볼게요."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네요."

그러나 한숨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나 보다.

"죄송한데,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다음에 만날까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집으로 돌아가기 전 죽을 하나 사서 팀장님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그는 잠들어있었다. 나는 그가 더 깊이 잘 수 있도록 조용히 불을 꺼주었다. 그리고 사온 죽 가방을 옆에 두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는데 팀장님에게 문자가 왔다.

"죽은 고마운데 향수는 뭐야? 피비린내 없애고 오라는 뜻? 그리고 손 편지는 좀 부담스럽다야."

이를 어쩌나. 지형 씨가 준 선물가방까지 같이 두고 온 모양인데, 그 안에 향수와 손 편지가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센스 있는 인규 팀장님이 향수와 손 편지를 찍어서 보내주었다. 누가 봐도 여성용 향수였다.


[새벽녘 이슬에 젖은 풀잎의 향기를 아시나요? 오래도록 이어져온 자연이 뿜어내는 향기를 담아 특별한 그대에게 선물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지형 씨는 향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에필로그


사람의 마음에는 방이 여러 개 있다던데 나는 한꺼번에 찾아온 세 남자에게 내 마음의 방을 한 칸씩 세를 내주었는지, 매일 나는 일기를 쓰듯 이 남자들의 방을 점검하고 있었다.

첫 번째 방을 차지하고 있는 한인규 팀장님은 미영 선배와 이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다치기까지 해서, 그를 향한 내 마음의 빚이 늘어나고 말았다.

두 번째 방을 차지하고 있는 썸남 이지형 씨에게는 오늘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오래도록 같이 하고 싶은 분께 드리는 특별한 선물이라는데, 여전히 나는 준 게 없다.

세 번째 방을 차지하고 있는 연하남 전현수에게서는 며칠째 연락이 오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다애에게 들은 5월의 햇살과 지구의 유일한 자연적인 위성 달의 이야기는 아직도 본인 인증을 받지 못한 상태이다.


언제쯤 주인을 결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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