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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겨울 그늘에는 햇살 한 톨이 간절하다>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11일

by 재섭이네수산

한 현장이 끝나고 나면 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우리 팀 루틴이다. 이번엔 병원에 있는 팀장님을 위해 더 잘 찍어 보내드리자 결의하고, 현장과 사람 모두 잘 보이게 한다고 사진사님께서 옆으로, 뒤로, 자리 옮겨서, 웃으면서, 브이를 날리면서 등등의 요구사항이 엄청 많았다.

옆으로 더 가라고 해서 두어 발 옆으로 움직일 때였다.

"악~"

나는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개똥!"

"어머, 소영이 개똥 밟았어."

"이런 변이 있나~!"

"주인들아~ 왜 개똥을 안 치우는 거냐~~!"

갑자기 화가 나 나는 냅다 소리를 질렀고, 다른 분들은 웃겨 죽겠다고 난리셨다.


이 얘기를 병원에 가서 팀장님에게 해주었더니 웃다가

"얘들아, 나 등 찢어졌어. 소영아 그만 웃겨라. 등이 벌어지는 것 같아."

했다. 우리 팀 주임님이 갑자기 나에게

"너도 개 키우면서 뭘 그래?"

그러는 거다. 나는 되받아치며

"아니 우리 개 똥이랑 남의 집 개 똥이 같아? 그럼 주임님도 똥 싸니까 남의 똥 밟으면 아무렇지 않겠네? 어?"

"내가 쌌냐? 왜 나한테 화풀이야. ㅎㅎㅎ"

"개 똥 밟더니 멍멍이 됐어. 조심해, 물 것 같아. ㅋㅋㅋ"

"우리 개는 진짜 물어요~~"

다들 웃겨서 난리였는데 나만 씩씩대는 상황이 더 웃기단다. 이 냥반들이 남의 일이라고 말이야.


팀장님이 그랬다. 소영이 덕에 웃는다고 말이다. 겨울 그늘에는 햇살 한 톨이 간절한 법이다. 나로 인해 맞이한 팀장님의 겨울 그늘이기에 내 이야기가 한줄기 햇살이었다니 내 마음의 그늘도 한 톨의 온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내친김에 몇 번 더 밟아야 하나? ^^


병실을 나올 때 어제 팀장님 병실에 잘못 놓고 온 지형 씨의 선물을 돌려받았다. 팀장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냥 나가려는 날 불러 눈짓으로 그 가방을 가리켰다. 가벼운 목례로 감사 인사를 하고 멋쩍게 가져 나왔다.


병원을 나서는데 저녁이 되니 살갗을 에어내는 강추위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입에서는 춥다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그 단어마저도 입 밖으로 나오면서 꽁꽁 얼어붙어버리는 한파였다.

"이 겨울에 향수라니."

이기적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겨울에는 향수보다 보온 용품이 더 절실하다. 겨울 그늘에는 햇살 한 톨이 간절한 법이니까. 그래도 막상 향기를 맡으면 내 생애 최고의 사치라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겠지?


그리고 우리 집 앞으로 현수가 돌아왔다.

"오래 있다가 잊히면 오려고 했는데, 누나 이사 도와주러 어쩔 수 없이 왔어."

현수와 나는 어느새 상대에게 잊히고 싶어도 자신이 잊을 수가 없고, 가만히 놓아주려 해도 스스로 다시 찾게 되는 그런 애매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아무튼 나는 내일 일요일을 맞아 당장 이사를 하기로 했다. 사실 짐도 별로 없고, 그 짐마저도 이삿짐센터에 부탁하면 되는 건데, 굳이 현수가 도와주겠다고 하니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해졌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현수의 인생이 오랜 시간 내게 맞춰진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은 해야 한다고 말이다. 현수가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나는 내 시간을 현수에게 나눠줄 생각이다. 오랜 시간 한결같이 부족하고 모자란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니까. 내 생애 그런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생애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 같은 이 사람을 더 알아보지 않고 그냥 놓아버린다면 반드시 커다란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혹독한 추위를 맞은 나를 녹여줄 햇살은 향수가 아니라 내 곁을 맴도는 달이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내년 입춘에 진짜 봄을 맞을 예정이니까 이 겨울만은 햇살 한 톨이 간절했다. 나는 현수에게 햇살이었고 이제 그가 내게 햇살이 되어줄 차례이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우리 만나다가 마음에 맞으면 결혼하고 안 맞으면 헤어지자. 어때?"

황당한 표정의 현수. 배시시 웃는 나.

"누나, 진심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예요?"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빙빙 돌았다.

"누나, 고마워요. 누나~"

"내려놔 이 놈아~"

현수는 나를 내려놓자마자 대뜸 입을 맞추려고 다가왔다. 나는 그 애의 머리를 때리며

"너무 빠르잖아. 천천히."

"아~ 몇 년을 참았는데 이 순간을 못 참겠네요."

현수가 나를 꼭 껴안았다.




에필로그


지형은 천성이 차갑고 그늘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지형은 밝고 따스한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했고, 지형은 세뇌를 당한 건지 밝고 환한 소영을 처음 본 순간 이 여자다 싶었다. 겨울 그늘에는 햇살 한 톨이 간절한 법이니까 말이다.


지형은 향수를 포장하고 짧은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번 향수의 브랜딩 콘셉트이기도 했다.

[새벽녘 이슬에 젖은 풀잎의 향기를 아시나요? 오래도록 이어져온 자연이 뿜어내는 향기를 담아 특별한 그대에게 선물합니다.]

이렇게까지 적어놓으니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상대에게 너무 이르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건 아닐까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 사람이다 싶을 때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이 있었다. '어떻게 한다.' 그는 고민하다 메모지 뒤 편에 자그마하게 적었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받아준다면 예스, 거절한다면 노라고 말해주세요.

뒷면에 쓴 이유는 겁이 나서다. 때때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한데 직접 말할 용기가 아직 지형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소영이 이것을 본다면 인연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보지 못한다면 인연이 아닌 걸로 여기자.' 딴에는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러나 선물을 주고 돌아온 그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소영에게서는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메모의 뒷면을 보지 못했나 보다. 지형은 '소영과는 운명이 아니었구나, 우리의 인연은 이렇게 끝이 나는가 보다' 단념하려 했다. 그러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내 '메모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거절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이런 기대가 생겨났고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기대가 져버려지지 않았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단념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꾸만 마음이 '아직은 포기하기 일러. 놓치면 후회할 거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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