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의 도움으로 이사는 순조로이 끝이 났다. 새 집은 전보다 회사와 가까웠고, 전보다 조금 넓었으며, 전보다 전세금도 조금 저렴해서 모든 면에서 너무 마음에 들었다. 현수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런 집을 구해줬는데 이사까지 도와줘서 너무 고맙다, 현수야."
"누나, 누나 남자친구로서 이건 제 즐거움이에요."
그러면서 내 얼굴을 쓰윽 쓰다듬었다.
"장난하지 마."
"소영아~"
"이것 봐라."
"원래 연인 사이에는 이름 부르고 반말하는 거야."
"이럴 거야?"
내가 한 대 쥐어박으려고 하는데 현수가 내 손을 꽉 붙들더니 또 음흉한 눈빛으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야 너 또, 그만 못해."
그때 현수가 내 머리에 붙어있는 먼지 덩어리를 떼내주며 씨익 웃더니
"도대체 누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뭘 그만하라는 걸까요? 누나, 이제 보니 완전 음란마귀~!"
이 녀석 완전 날 가지고 노는데, 아 한 방 제대로 먹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현수 말마따나 어쩌면 내가 더 그를 남자로 의식하며 스킨십에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몇 번 '내가 이렇게까지 밝히는 사람이었나?' 놀랄 만큼 조금씩 터치하는 현수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몰랐었는데, 나는 참으로 긴 시간 동안 조신한 사람인양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나 보다. 아니면 생각보다 내가 더 현수를 좋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현수의 늠름한 뒷모습이 갑자기 덜컥 너무 멋있어 보였다.
"현수야."
"누나, 갑자기 왜 그렇게 불러요? 그리고 그 눈빛 뭐예요? 가슴 떨리게."
쓰레기봉지를 들던 현수가 뒤돌아 보더니 흠칫 놀라며 쓰레기봉투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빵 터졌고 현수가 가슴팍에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는데 나는 갑자기 현수에게 달려들며 마구 안기려고 하는 시늉을 했다.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세요. 저 처음이란 말이에요."
현수가 앙탈을 부렸다.
"어허~ 이 누나가 조심히 다뤄줄게."
그러면서 현수의 품에 쓰레기봉투를 안겨주었다.
"어서 다녀와. 저녁 먹게."
그리고 엄마처럼 현수의 엉덩이에 궁디팡팡을 시전 해주었다.
"아 엄마처럼 굴지 마 누나. 정 떨어져!"
현수가 나가자마자 한 팀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사는 잘했어?"
"네. 현수가 도와줘서 다 끝내고 저녁 먹으려고 해요. 선배는요? 저녁 먹었어요?"
"응. 현수랑... 좋은 시간 보내라."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선배는 마치 현수와 나 사이를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무슨 좋은 시간. 무슨 말이야 그게?"
나는 웃으며 눙을 치려고 했다.
"현수, 좋은 애야. 너한테 잘할 거야, 분명."
그때 수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물수건 가져왔어. 얼굴부터 닦아줄까?"
미영 선배 목소리?
"잠깐만. 소영아, 끊자."
연민이라 할지라도 나는 현수와 시작했다. 미영 선배와 인규 선배가 끝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현수와 시작을 했단 말이다. 그런데 나는 왜 다시 미영 선배와 인규 선배가 함께 있다는 그 사실에 마음이 이상할까? 나는 도통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을 나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거 완전 나쁜 년인데?
"누나, 근데 이건 뭐예요?"
현수가 소영에게 내민 것은 며칠 전에 지형 씨가 준 향수 선물이었다.
"그거 선물 받은 거야."
"어디 둘까요?"
"거기 아무 데나 놔둬."
"누나, 선물 받은 거라면서 아무 데나 놔두라니요? 누나 이런 사람이었어요? 남이 준 선물을 아무 데나 놔두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실망이에요."
현수는 장난스레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헉 찔렸다.
"아 그러게. 내가 좀 심했다. 사실 그거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어."
"그 정 많던 누나가, 나 때문에 완전 이성이 상실되었구나. 나 기분이 좋은데."
그랬을까? 아니면 방금 받은 전화 때문에 이성이 상실된 건 아닐까? 좀처럼 마음이 현수에게 정착되는 것 같지 않는 이 기분, 이러다가 진짜 나는 나쁜 년이 되는 거 아닐까? 불안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현수에게 다가가야 하려나?
"내일 영화 볼까요?"
문밖을 나서며 현수가 물었다. 소영은 현수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건성으로
"그러지 뭐."
라고 대답했다. 현수는 내가 정신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다음 질문을 빠르게 이어나갔다.
"저녁도 같이 먹을까요?"
"그러지 뭐."
"우리, 매일 만날까요?"
"그러지 뭐."
"우리 결혼할까요?"
"그러지 뭐. 아 찾았다."
현수가 어떤 질문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대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현수가
"결혼은 언제 할까요?"
웃으며 말했다.
"무슨 결혼? 누가 결혼해?"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거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준 씨디야.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계속 갖고 다녀."
"그랬어요? 와 너무 영광인데요. 당연히 버렸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 씨디플레이어가 있거든. 지금 듣고 갈래?"
"더 있다간 누나를 덮칠 것 같은데."
"잘 가."
현수를 보내고 소영은 아까 아무 데나 둔 선물 가방을 치우려고 집어 들었다. 탁자에 앉아 종이 가방에서 향수를 꺼내 들고, 편지도 꺼내 들었다. 사진으로 본 것과 똑같아 소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금 종이가방에 넣고 잊어버리기 전에 지형에게 선물 고맙다는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지형이 기다리는 대답은 이게 아니었는데 두 사람의 운명은 이렇게 어긋나게 되는 모양이었다.
에필로그
소영의 집 바깥으로 나온 현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종이가방, 그 안에 편지 때문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순간 궁금증이 일어 편지를 꺼내보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누가 준 편지일까 궁금해 앞뒤로 뒤져보다 뒷면에 조그맣게 쓴 글을 현수가 소영보다 먼저 보게 된 것이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받아준다면 예스, 거절한다면 노라고 말해주세요."
'누구일까? 누나는 노라고 말하고 내게 온 걸까?'
그러다 생각해 보니 누나는 아직 열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소영은 아직 그 편지를 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며칠 전에 누나가 그 편지를 보았다면 지금쯤 우리 관계가 달라졌을까?'
현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부정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할 만큼 그 편지가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사실 순간적으로 편지를 빼버릴까 하는 나쁜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페어플레이가 아닌 것 같아 다시 넣어두었다. 그렇게 치졸하고 비겁하게 누나의 마음을 얻고 싶진 않았다. 사실, 그걸 본 소영의 마음이 달라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것은, 현수 스스로 아직도 소영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슬픈 사실이지만 소영이 왜 자기에게 와주었는지 현수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현수를 향한 소영의 마음이 연민이든 사랑이든 현수에게 다시없을 이 기회를 현수는 놓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소영을 아껴줄 것이고, 소영 말처럼 만나보고 아니다 싶을 때는 헤어지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운명의 서사는 그들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소영에게 봄을 찾아줄 반려자가 현수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