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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사랑이라면 더 뜨거워야 하는걸까?>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1월 13일 자.

by 재섭이네수산


오늘 아침은 사무실에 좀 늦은 출근을 했다. 시스템비계를 반납해야 하는데 가설장이 8시 30분에 문을 열기 때문이다. 반납 절차를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10시였다.


10시. 어젯밤 10시에 일이 떠올랐다.




밤 10시. 현수가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벨이 울렸다. 이 집을 아는 사람이 아직 없을텐데 누구일까? 밤손님일까 싶어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왔다.

"누구세요?"

"누나, 저에요."

현수가 돌아왔다. 그 밤에.

"왜? 뭐 두고 갔어?"

나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현수가 문을 걸어잠그며 말했다.

"네. 누나를 두고 갔더라고요."

"뭐야?"

기습적으로 현수가 나를 껴안았다.

"누나, 좋아해요 많이."

갑자기? 이상하게 진짜 마음을 열어달라는 말처럼 들렸다. 어찌보면 확신을 보여달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나도 너 좋아해."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이 선뜻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전 좀 불안해요. 내일이면 누나가 또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내가 그에게 어떤 확신을 보여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 사랑이라면 더 뜨거워야 하는 것일까? 나는 사랑이 처음이라 서툰 게 아닐까 싶어 조금 과감해져 보기로 했다.

"자고 갈래?"

현수를 도발했다.

현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게 대차게 입을 맞췄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내 첫키스였다. 현수가 과감하게 내 윗옷을 더듬 대는데 갑자기 나는 민망함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나~"

"미안."

"분위기 깨졌잖아요."

"미안. 근데 너 지금 어딜 만지는거야?"

현수의 손은 내 갈빗대에 와있었다. 뜨거웠으나 우린 많이 서툴렀고 그래서 어색했다. 그리고 이미 깨어진 분위기는 코미디가 됐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앗 뜨거."

어제의 기억만큼 커피잔이 뜨거웠다.

"커피잔이 얼마나 뜨겁길래 귀까지 빨개졌어?"

동기 명선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팀장님 왔어."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반색했다.

"벌써?"

"아니 새로운 팀장. 한 팀장님은 퇴원하는 대로 지방 발령."

나는 잡으려던 커피잔을 떨어뜨렸다.

"소영아 괜찮아?"

"괜찮아."

문득 어제 현수와 좋은 시간 보내라던 팀장님 말이 떠올랐다. 두고가는 내가 걱정이라도 된건가? 미영 선배 목소리도 들렸었는데 둘이 다시 만나기라도 하는걸까?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나 때문에 다쳤는데. 이대로는 미안해서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그 핑계로 붙잡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대학까지 포함하면 7년 동안 가족보다 가깝게 거의 매일같이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던 팀장님과 다시는 못 보는 날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당최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랑보다 뜨거운 그 무엇일까?


그후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마치는 대로 병원에 가 확인을 해봐야겠다. 확인을...




"오랫만이에요."

팀장님이 입원한 병원 앞에서 우연히 지형씨를 만났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여긴 어쩐 일이세요?"

"거래처 팀장님 만나러 왔어요. 여기 입원해 계시대서요. 소영씨는요?"

"저는 저 직장 상사분이요. 입원해 계셔서요."

"그럼 일 보고 나면 저녁 같이 할래요? 제가 살게요."

"아녜요. 전에 선물도 감사한데, 이번엔 제가 살게요."

"좋아요."

그리고 시계를 보고 지형씨가 말했다.

"7시면 충분하겠죠?"

"네."

그때 나에게 현수의 전화가 와서 나는 지형씨와 가벼운 손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지형씨는 수화기 손동작과 입모양으로 전화할게요 라는 싸인을 보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현수야, 나 팀장님 보러왔어. 지방 가신대서 만나뵈러. 늦을 것 같아. 밥 잘 챙겨먹고. 내일 봐."




그러나 나는 병실 손잡이를 잡았다 이내 놓고 말았다. 오늘도 미영 선배가 병실에 와있었다.

'미영 언니 매일 출근을 하네.'

기분이 묘했다. 들어가지 못할 일도 아닌데 문앞에서 머뭇대는 내 자신이 나도 수상했다. 그리고 나는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을 굳이 엿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놀라서 멈칫 하는 나를 누군가 잡아 끌었다.

지형씨였다.




에필로그


지형은 소영의 문자를 받고 선잠을 잤다. 사실 지형은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다는 것은 참 생소한 경험이었다. 새벽 3시. 즐겨마시는 허브차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잠을 청해도 쉬 잠에 들어지지지 않았다. 그냥 포기하고 책을 잡아들었다. 소영과의 추억이 있는 책이었다.


지형은 온라인으로 만난 독서 모임에서 소영과 처음 만났다. 그러나 소영은 지형을 알아볼 수 없었다. 지형이 필명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개팅을 한다는 친구 녀석이 먼저 사진을 보여주며 이름을 알려주었는데, 윤소영이라고 했다. 연말 독서모임 끝에 소영이 "1월 1일 소개팅을 해서 입춘을 맞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었다. 그렇다면 친구 녀석이 1월 1일 만나는 윤소영은 분명 독서모임의 윤소영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지형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친구에게 자신이 대신 소개팅을 나가면 안 되겠느냐 부탁했고, 친구는 흔쾌히 잘 되면 양복 한 벌이라는 단서를 걸며 허락해 주었다. 덕분에 1월 1일 글로만 만났던 소영을 직접 만났다. 지형에게 꼭 필요한 따스한 그녀가 확실했다.


지형은 언제쯤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해야 할까? 겨우 열흘이 지났건만 10년은 기다린 사람처럼 조급해지는 것이 좀처럼 지형답지가 않았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얼마나 더 뜨거워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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