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다른 남자 못 다가오게 한다고 오빠 이용하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 처음부터 오빠가 좋았어. 그래서 그런 핑계로 오빠 붙잡아둔 거야. 알지?"
"알지. 근데 난 지금도 그게 이해가 안 되고."
인규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미영아, 나보다 좋은 사람 널렸다."
"나한텐 오빠가 제일 좋은 사람이야."
"미영아, "
"너랑 나랑 근본적으로 안 맞아. 이 말 귀에 딱지 앉겠다."
인규는 미영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그 마음을 받아주지는 못했다. 미영은 천성이 곱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인규처럼 성격이 강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독함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냥 미영은 더 잘나고 더 멋진 사람 만나서 정말 힘들지 않고 곱게 살아야만 한다는 느낌이 처음부터 강하게 들었었다. 인규에게 있어 미영은 그런 존재이다. 미영이 비를 맞고 있다면 우산은 씌워주겠지만 같이 쓰진 않는다. 가야 할 길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이기에.
나는 그 모든 말을 다 들어버렸다. 발길을 돌렸어야 했는데, 아무리 정말 두 사람이 끝났는지 알고 싶었다 한들 나는 돌아섰어야 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아무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는 그 순간, 내 마음의 봉인이 해제되어버렸다. 그때 지형이 나의 손을 붙잡았다.
"소영 씨 쥐였어요?"
엿듣다 들킨 자로써 나는 민망함에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소영 씨, 커피 말고 나랑 술 한잔 할까요?"
대담한 제안이었다. 그리고 솔깃한 제안이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오늘 나는 술 한 잔이 절실했다.
"좋아요."
술의 힘이란 대단했다. 그 점잖고 뻣뻣하던 지형 씨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난리 브루스였으니까. 우리 두 사람은 다시는 안 만날 사람처럼 한바탕 질펀하게 놀아제꼈다.
분명 늦게까지 지형 씨와 놀고 있었는데 눈을 뜨니 내가 한 팀장님 병실 보호자 침대에 누워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소영아~!"
한 팀장님의 부르는 소리에 걸음아 나 살려라 더 빨리 뛰쳐나갔다.
아직도 어둑한 문 밖으로 또 눈이 오고 있었다. 그제야 확인한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집으로 도착했을 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현수의 얼굴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나는 숙취로 인해 화난 그 앞에서 헛구역질을 하고야 말았다.
"술 마셨어요?"
"응. 조금."
"조금 마셨는데 외박을 해요?"
"외박이라니? 지금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건데?"
두려움인지 술김인지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둘러댔다.
"내가 여기 몇 시에 왔는 줄 알고?"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4시?"
그런데 그때 속이 울렁거리며 토기가 올라왔다.
"현수야, 나... 토할 것 같아. 우웩~~"
말이 끝나자마자 현수의 발에 그만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적나라하게 실토하고야 말았다. 뒤치다꺼리하는 현수가 말했다. 내게 오만 정이 떨어진다고 말이다. 나는 어지러운 그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현수가 농담으로 한 오만 정이 떨어진다는 말을 나는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소영은 부어라 마셔라 자기가 따르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더니 결국 술에 떡이 되었다. 그에 반해 지형은 술에 강한 자, 전혀 취하지 않고 살아남아 소영의 그 모든 추태를 지켜보았고, 뒤치다꺼리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소영에게 집을 알려달라고 해도 알려주지를 않고, 전화는 패턴이 걸려있어 열 수가 없으니 지형은 난감하기만 하였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갈까 하는 순간 소영이 말했다. 인규의 병실로 가야 한다고 말이다. 해야 할 말이 있다고. 지형은 소영이 원하는 대로 인규의 병실로 데려다주었다. 지형은 인규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규의 간병을 해주시는 분께서 몰래 병실 문을 열어주어 소영을 보호자 침대에 눕혀주었다.
"지형 씨가 수고가 많네요. 그러니까 사람 잘 골라서 만나요."
인규가 웃으며 말했다. 지형이 정색하며 말했다.
"신중히 골랐습니다."
그때 소영이 소리쳤다.
"한인규 씨를 만나야 합니다. 할 말이 있어요!"
그러자 지형이 소영의 입을 막았고 인규는 이마를 짚었다.
"신중하게 생각해 보신 것 맞죠?"
인규가 다시금 묻자 지형도 그제야 웃으며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청이 너무 크네."
그 시각 연락이 되지 않는 소영의 집 앞으로 현수가 찾아왔다. 팀장님을 만난다고 하고 지금까지 연락 두절. 늦은 시간인데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 현수는 머뭇거리다 결심한 듯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소영이 돌아오는 것만 보고 가야겠다 했는데 추위에 떨어선지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다. 아직까지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외박이라니. 어디서, 누구와 외박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에서 나오는 의심일까? 단순한 질투일까? 현수는 화가 났다. 그리고 다시 누나를 만나는 순간까지 숱한 생각 끝에 이대로 누나를 만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일까 의심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누나와 헤어진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