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호라는 친구 녀석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따라간 동아리였다. 대학생 되자마자 술이나 마시고 사람 만나기나 좋아하는 한량인 내게 봉사 동아리라니 정말 맞지 않는 옷 같았다. 어차피 온 것 자리나 채워주자 했을 그때였다. 깜짝 놀랄 미모의 여학생이 들어와 내게 다가왔다. 우리 학교에 이런 미인이 존재했다고?
"오늘 처음 오셨죠?"
"네."
그러자 그녀가 내게 동아리 팸플릿을 내밀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반짝이는 눈동자는 마치 밤하늘에 별빛이 떨어져 그 속에 숨은 듯 밝게 빛나고 있었고, 자그마한 얼굴에 머금은 옅은 미소와 수줍은 말투는 모두의 첫사랑이 되고도 남을법한 미모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마음은 거기까지였다. 한량인 나와 모범적인 그녀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선을 그었다.
미모의 여학생이 주고 간 동아리 소개 팸플릿을 읽어보았다. 점자와 수화를 가르쳐주고, 주말엔 봉사활동을 나가는 진짜 보기 드문 실천하는 동아리였다. 나는 살면서 내가 한 좋은 일을 손에 꼽아보려 했는데, 손가락 하나도 접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시작하라는 기회련가?
내가 갑자기 이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자 나를 데리고 온 병호가 오해를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그 아리따운 그녀에게 반해서 이런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를 굳이 아름다운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
"미영아, 인사해. 여긴 한인규. 내 친구. 앞으로 성실하게 참석하겠대."
"아 네~. 잘 부탁드릴게요. 최미영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난 부담감을 잔뜩 안고 본의 반 타의 반 미영이와의 질긴 인연을 시작하게 되어버렸다.
아리따운 미영이 주변엔 날파리들같은 -이런 과격한 표현이 어울릴법한- 남자들이 참 많이 꼬였다. 그러나 미영은 그만한 관심을 너무 버거워했고,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기 남자친구인 척해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유일하게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남자가 아니라는 게 부탁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다면 자기가 먼저 우리 둘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밝히겠노라 약속하였다. 나는 흔쾌히는 아니지만 그녀가 너무 간절해 보여 그러마 했다.
놀랄 만큼 빠르게 삽시간에 온 학교에 내가 미영이 남자친구라는 소문이 났고,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미영이 도와달라고 할 때마다 한 번씩 찾아가 날파리들을 처치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게 마냥 좋지가 않았다. 미영이와의 사이가 적잖게 부담스러울 때 나는 마침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인이 되었고, 미영이는 교환학생으로 외국에 다녀왔는데, 나보다 미영이가 먼저 졸업을 하며 이렇게 자연스레 인연이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졸업 후 입사한 건축사 사무소에서 우연히 먼저 취직한 미영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곧 미영이가 나를 이 회사에 꽂아주었다는 오해로 이어지고, 나는 마치 곧 미영이와 결혼할 상대자가 되어있었다. 소문은 정말 밑도 끝도 없었다.
내가 복학을 하고 처음 간 엠티에서 갓 입학한 소영이를 보게 되었다. 모두가 한껏 자신을 나타내기 바쁠 때 소영이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말했고, 다들 자신이 주목받고자 혈안일 때 소영이는 주변 친구들을 챙기는 아이였다. 나는 그런 소영이가 지나쳐지지 않아 조금씩 챙겨주었고, 그러다 보니 소영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일을 할 때면 특별히 예민해지는 나를 잘 캐치하고 먼저 커피 한 잔을 내밀며 기분을 풀어주는 그 애에게 나는 점점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유한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어느 날 미영이 돌아왔다.
미영이 귀국 기념으로 내게 보라색 머플러를 선물해 주었을 때 내가 대뜸
"보라색? 소영이라고 신입생 있거든. 엊그젠가 동아리 아이들과 다 같이 노래방엘 갔는데, 내가 오랜만에 술에 취해서 소영이가 부르는 보랏빛향기를 갑자기 같이 부르더래. 내가. 보랏빛 향기를. 신입생이랑. 말이 되냐?"
그러면서 내가 웃고 있었다고 한다. 술과 벗하고 연애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던 내가 소영이가 누구인지, 그 애 얘기만 하면 내 입이 귀에 걸린다고 미영이가 말했다. 그때 내 마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멍청이 같이...
그 후로 몇 년이 흘렀어도 나는 연애 고자인지라 진짜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일에 몰두하며 일과 사랑에 빠져있었으며, 좋은 후배 소영의 곁에 좋은 선배로 마냥 저냥 머물러 있었다.
2024년 마지막 날, 미영에게서 2025년 1월 1일에 소영이가 결혼을 위해 소개팅을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다음 날 새해 아침 눈을 떴는데 이상스레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좋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상하게 뭘 해도 재미있지가 않았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하루종일 짜증이 났다. 그리고 늦게 먹은 점심이 체해서 내려가질 않았다.
다음날, 어제 내내 궁금했던 소영에게 소개팅은 잘 되었는지 물었다.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갑자기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꺼억~ 속이 시원해졌고, 잃었던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제 인정하자. 나... 좋아하네, 이 애를.
에필로그
1월 1일 연인 만들기. 한인규의 시점.
1월 1일. 소영이의 소개팅 날이다. 좀처럼 잠도 오지 않고 그렇다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아 커피 한 잔 내리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허겁지겁 나가는 소영이가 보였다. 나도 허겁지겁 아무 겉옷이나 집어 들고 지하주차장으로 가 차를 몰고 나갔다. 다행히 택시를 잡지 못하고 쩔쩔매는 소영이가 보였다. 자연스럽게 차를 세웠다.
"어서 타. 나도 약속이 있어서 거기로 가는 길이야."
"고마워요 선배."
거기로 간다고 했는데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소영이의 소개팅 장소를 모른다. 나의 약속 장소는 더더욱 모른다. 약속이 없으니까.
"근데, 소영아 어디로 가면 될까?"
다행히 소영이는 내 옷에만 신경 쓸 뿐 내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소영이를 내려주고 차를 세운 채로 한참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 얘를 좋아하네. 왜 이제야 알았을까? 멍청이 같으니라고. 이런 똥멍청이 같으니라고. 이런 세상 만상 무지한 멍청이 중에 개똥멍청이 같으니라고. 자책하고 자책해도 버스가 떠난 것만 같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감정의 폭이 큰 사람이었던가? 그동안 그 애가 내 곁에 있었기에 나는 그냥 안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늦은 깨달림에 뼈가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