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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1월 7일. <5월의 햇살 그리고 달의 운명>

다시 쓰는 결혼 일기 - 번외편. 달의 운명 전현수

by 재섭이네수산

내게 있어 누나는, 5월의 햇살 같았다.



대학교 신입생 동아리 모집하는 날은 마치 축제와 같았다. 각종 동아리에서 춤과 연기와 노래들로 시끌벅적할 때 내 시선을 사로잡는 동아리가 한 곳 있었다.

"시각장애인 봉사 동아리입니다. 점자로 이름 찍어드릴게요."

멀리서도 들리는 밝은 목소리, 경쾌한 웃음소리에 나도 같이 미소가 지어졌다.

"저 점자 찍어주는 누나 너무 참한데."

"안돼."

나도 모르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성수는 알아주는 바람둥이었다.

"뭐라고?"

"저 옆에 누나가 훨씬 예쁘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차가워 보여. 점자 찍어주는 누나가 백배 따뜻해 보인다. 저 누나한테 가야지~ 누나~ "

성수가 누나에게 다가갔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성수보다 빨리 가야 한다. 나는 경보선수처럼 있는 힘껏 티 안 나게 걸어가 성수보다 빠르게 누나의 탁자에 터치다운했다. 나를 올려다보는 궁금증과 설렘을 품은 싱그런 눈빛, 내 가슴이 어린애처럼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이름이 뭐예요?"

"전현수입니다."

그때 폭탄 동아리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에 누나가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팔을 휘휘 저으며 발라당 나자빠졌다. 그 모습에 나도 누나도 주변인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으세요?" 나는 누나를 일으켜 세워주려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누나는 보지 못하고 혼자 빛의 속도로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히 의자에 앉으며 "미안해요." 했다. 그러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맞추자니 얼굴이 붉어져오는 것만 같았다.

"이름이?"

"전현수."

누나는 자신의 이마를 세게 찰싹 때리며

"아 전현수! 맞아, 전현수."

그러더니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절대 못 잊을 이름이로구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름 찍어드릴게요."

나는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전현수, 이 새끼 봐라. 너 이렇게 크게 웃는 거 처음 본다!"

성수가 뭐라 하든 내 눈엔 누나만 보였다. 누나는 내게 봄처럼 다가온 5월의 햇살이었다.

누나가 점자로 내 이름을 찍어준 코팅된 종이는 내 책갈피로 쓰이며 지금까지 내 지식과 함께 자라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동기들 여럿이 술과 안주를 바리바리 싸들고 여자 동기인 지영이네 집으로 놀러 갔다. 거실에 앉아 한참 떠들고 놀고 있는데, 다들 조금씩 취해있었으나, 나만은 취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문을 따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우리 언니야. 괜찮아."

지영이네 언니는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경쾌한 목소리로

"어, 안녕~" 인사하더니 "나 신경 쓰지 말고 놀아~" 하며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갔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내가 지영이 언니를 알리가 없는데, 설마... 점자 누나?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확인해야 한다.

"나 화장실."

나는 일어나 모두가 노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모르는 척하고 화장실이 아닌 지영이네 언니의 방문을 노크했다.

"네?"

"화장실에 계신가요?"

"아 여기 화장실 아니야. 잠깐만."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지영이네 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5월의 햇살, 점자 누나가 맞았다.

"화장실은 이 옆이야."

그러나 누나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점자 누나? 저 현수예요, 전현수."

우리는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그러나 오히려 이 날은 내게 불운을 안겨주었다. 나와 누나 사이가 동생의 친구로 완전히 선이 그어진 날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누나는 원래 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에 잘 놀랐다. 함께 동아리 홍보 전단지를 붙이러 다닐 때면 대문 안에서 짓는 개소리에 놀라 자빠지기 일쑤였는데, 자빠지는 것도 요란하게 자빠지고, 일어나긴 또 엄청 빨리 일어난다. 부끄러워서란다. 그게 내 웃음버튼이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누나와 있을 때 가장 많이 웃고, 누나와 있을 때 가장 수다스러워지며, 누나와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누나의 옆자리가 내 것이 아니어도 누나를 떠나지 못하고, 그 곁을 맴맴도는 지구의 유일한 자연 위성인 달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달의 운명, 나는 그것으로 만족했건만 다애라는 유성과 부딪히며 나는 달의 궤도를 이탈하고 말았다.




에필로그

"1월 1일의 연인 만들기-현수의 시점"

며칠 전 지영이에게서 소영 누나가 이사 갈 집이 필요하다는 얘길 전해 듣고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마침 울고 있는 다애와 함께 있는 1월 1일 새해로 넘어가는 새벽이었다. 나쁜 자식에게서 다애를 구해내고 한참을 다애 곁을 지켜주고 아침을 맞을 때쯤 부동산 중개인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급매로 집이 나왔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울고 있는 다애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죄송한데, 다음에 가면 안 될까요?"

"아 죄송하지만 대기자 분이 계셔서 취소하시는 거면 다음분께 연락드리는 수밖에 없어요."

결정해야만 했다.

"다애야, 미안한데 나 가야 할 것 같아."

"또 소영언니한테 가려는 거야? 넌 어떻게 몇 년이 흘러도 소영 누나 소영 누나! 소영 누나 타령이야! 어떻게 지금도."

"......"

"소영 언닌, 오늘도 소개팅 나갔어. 넌 안중에도 없다고 바보 멍청아!"

"미안해. 다애야, 그래도 괜찮아 나."

"너 선택해. 지금 가면 너 다신 나 못 봐. 그래도 갈 거야?"

"다애야. 나는 안 달라져. 알잖아? 노력해도 못 달라져. 너는 못 보고 살아도 누나 못 보고는 못 살겠더라."

그렇게 다애를 영영 놓치는 결정을 하고, 누나가 좋아하는 따뜻한 캔커피를 사서 식을 새라 품에 안고 소개팅을 마친 누나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저기 멀리서 식당 유리문을 열고 누나가 들어왔다. 이 한 겨울에도 그녀는 내게 5월의 햇살이었다. 여전히 덜렁거리는 누나는 앞에 신문을 못 보고 부딪혀서 한 부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걸 줍느라 누나가 허리를 굽힐 때 나는 내 마음을 담아 그 앞으로 캔커피를 굴려 보냈다. 누나가 다른 한 손으로 캔커피를 잡았다. 그리고 따뜻하다며 웃는다. 그거면 족하다. 나는 달의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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