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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1월 6일. <바다를 일렁이게 하는 것들>

다시 쓰는 결혼 일기

by 재섭이네수산


오늘 새벽에 다시 내린 폭설로 눈을 치우는 손길이 어느 곳에서나 분주했다. 나 또한 집 앞부터 시작해 일하는 현장까지 열심히 눈을 쓰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눈 때문에 일주일이면 끝내줘야 하는 일이 또 난항에 부딪혔다. 겨울에 눈은 늘 이렇게 우리의 일을 지난하게 한다. 게다가 이번 주중에는 최강 한파가 기다리고 있다는 날씨 소식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런데 한파 소식 뒤에 이어지는 안타까운 산불 소식, 눈이 많이 오지 않은 영동 지방에 산불이 났다고 하니, 눈 쓰는 게 힘들다 하나 눈은 산불 예방과 내년 농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이다.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교훈이 있는데, 좋은 게 항상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항상 나쁜 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어제 함께 가자 했던 노래방을 거절했다고 아침부터 인규 선배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어제의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평소 생각이 많은 나는 어제부터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즉흥적으로 살아보기로 한 사람처럼 굴었다. 오전에 지형 씨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오후에 현수가 예약한 맛집으로 갔다. 내가 아직 누군가와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을 약속한 것도 아니니까 이건 엄밀히 말해 자유연애 아닐까? 내가 사람의 관계라는 것에 매번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보이는 것만 가지고 저 사람은 그럴 거야 재단하고, 한두 번 만나고 섣불리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믿었기 때문 아닐까?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에도 서로가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만남을 이어갈 수 있는지 탐색하는 시간은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어제는 두 탕을 뛰는 현명한 자유연애를 스스로 칭찬해 주었다.




눈이 온 뒤라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는 작업은 취소가 되었다. 엊그제 대비한다고 비계 위아래 다 정리를 해두었지만 다시 한번 눈으로 인한 피해가 없는지 확인한다고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괜스레 올라갔다가 떨어질 뻔한 일이 있어서 모든 실외 작업은 날이 풀린 뒤로 미뤄졌다.

인규 선배가 갑자기 물었다.

"만약 내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고 해. 그럼 넌 어떨 것 같냐?"

"아침부터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상상하기도 싫네요."

그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되었든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면 충격받지 않을까? 그렇게 손사래까지 치며 대답 대신 화를 냈지만 이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신혼여행을 다니고 있는 친구에게서 겨울 바다 사진이 도착했다. 내 마음속 잔잔한 바다에 파도가 일었다.


잔잔한 바다를 일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선배를 향해 잔잔했던 내 마음에 다시금 일어나는 이 파장은 무엇일까? 미영 선배와 헤어진 인규 선배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내 옛 정이 떠올랐을까? 좀 억울한 사실이지만 나는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의 멋진 모습에 나 혼자 눈이 돌아갔었던 적이 있었다. 다 지난 일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인규 선배는 떠나간 미영 선배를 생각하며 만약 자신이 다친다면 미영이가 마음을 돌려 돌아올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이상하게 내 가슴에 뽀죡한 송곳이 와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그러다 문득 어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자리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지형 씨의 제안을 거절했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영화가 재미없었나 봐요."

나오는 길에 하품을 하는 나를 본 지형 씨가 물었다.

'당연하죠. 봤던 영화니까요. 게다가 재미없게 봤던 영화랍니다.' 속으로만 말했다.

"조금. 지형 씨는 어땠어요?"

"재미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저녁을 살까 하는데."

"괜찮아요. 저녁까지 얻어먹으면 너무 미안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저녁은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

나는 저녁 약속이 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을 할 이유도, 돌려 말할 이유도 없었다. 사실 이 사람과 나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만약 제가 소영 씨와 영화를 본 다음 긴 텀도 없이 막바로 다른 여자와 영화 약속을 잡았다면 소영 씨는 어떨 것 같아요?"

"아 이 사람~ 자유연애를 즐기시는구나 생각할 것 같아요."

나는 즉답했다.

"사람을 많이 만나보는 건 좋은 거니까요. 근데 의외인데요? 지형 씨가 그렇게까지 열린 마인드로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하하. 흠... 사실 소영 씨가 질투해 주길 기대했어요."

나는 그냥 피식 웃었다.




지형 씨와의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또 현수를 기다리게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식당 앞에서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1월 1일 현수가 내게 쥐어주었던 캔커피와 스쳐 지나가던 그의 손길에서 느껴진 온기가 떠올랐다. 언젠가 현수가 내게 말했다. 누군가와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제일 먼저 자기를 떠올려 달라고 말이다. 그 말 때문에 1월 1일 연인 프로젝트에 어쩌면 내심 현수를 빼놓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저렇게 추위와 더위를 오가며 한 해를 오롯이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 생각에 문득 마음에 송글거리는 뭉클함이 피어올랐다.


대체 오늘 하루에 몇 번의 파도가 일어나는 것일까?




에필로그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세 사람에게서 비슷한 시간에 자느냐는 문자가 왔다. 나는 누구에게 먼저 답을 보내야 할까? 대체 내 마음은 누구에게 가있는 것일까? 나도 내 마음을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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