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청명한 여름날의 하늘처럼, 무엇이든 더욱 선명해지는.

by 보드라워

유년시절 여름의 맛.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늦잠도 자도 되는

꿀 같은 주말 아침.

주방에서 들리는 슥슥슥 벅벅벅 시원한 소리에 눈을 뜨는 맛.

엄마가 체망에 미숫가루를 곱게 걸러내고,

우유에 설탕 한 스푼 듬뿍, 얼음 동동 띄워 잘 섞어낸 고소하고 달콤한 미숫가루의 맛.


엄마 손잡고 단골 마트에서 단팥과 연유, 후르츠 칵테일, 알록달록 젤리와 빙수용 떡을 사서 신나게 집으로 돌아가던 맛.

온가족이 둘러앉아 아빠가 갈아내는 얼음을 바라보며 많이 더 빨리를 외치던 여름 저녁의 맛.

얼음이 나오기 무섭게 연유를 두르고, 각종 재료를 가득 려내어 한입 먹으면 달콤, 시원하게 퍼지던 여름 빙수의 맛.

겨울에는 엄마가 먹지 못 하게 했던 아이스크림도 당당하게 먹을 수 있던 특별한 맛.


교실 천장의 낡은 선풍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그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연신 귀로 넘겨가며

수업을 듣던 성가신 여름의 맛.

햇볕에 반짝이는 모래알이 가득한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 말씀을 듣던 마라맛 여름날.


우리 집이 에어컨을 샀던 날, 친한 친구들이 모두 놀러 와 좁은 방안에 옹기종기 누워 뒹굴던 추억의 맛.


아빠 팔베개를 하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아빠의 팔이 더 가늘어지지 않길 소망하던 여름의 밤.


시원하고 얇은 이불 위에 철퍼덕 누워 팔, 다리를 휘저으며 부드러운 촉감에 얼굴을 파묻던 맛.


냉장고 문을 열면, 뽀얗게 숙성된 동치미와 시원한 식혜가 한병 가득 찰랑이던 엄마표 정성의 맛.


이제 동치미를 직접 담그고, 그 정성의 모양을

흉내 내어 보며 하나둘 떠올려보는 여름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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