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불안, 엄마 쪽입니다.

입영열차 아니고 태권도차량입니다만..

by 진다락

딸을 낳으면 축하를 받고

아들을 낳으면 위로를 받는다.

어쩌다 아들을 둔 엄마는

연민의 시선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


유치원에서 아들만 셋을 키우는

어머님을 만나면 괜스레 존경심이 생기고

학급 내 남아 비율이 많은 반 담임을 맡게 되면

자연스럽게 '헌터 모드'를 장착한다.

어린이 보험료도 여아보다 남아가

더 비싸다고 하니

어쩌다 우리 아들들은

이런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 걸까.


미운 7살 아들의 특징

가만히 있으면 아픈 거다. 조용하면 사고 치는 중이거나 이미 사고 치고 도망갔다.

친구란 없다. 서열만 존재할 뿐. 매일이 서바이벌 참전 중이시다.

감정 표현? 나는 이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치지 않았던가...?

가끔 선물을 준다. 색종이로 꼬깃꼬깃 접은 팽이, 칼, 기타 등등...

박학다식하다. (일부 분야에 국한되어 있음 주의. 곤충/공룡/포켓몬 한정)

엄마 보호 미션을 최우선하는 보디가드(이지만 너랑 있을 때가 제일 위험해)


우리 집에도 이런 귀한 아드님이 계시다.

유치원에서 N년째 7세 담임을 맡고 있는

내가 보기에

피그는 나름 섬세하고 감성적인 편이지만

아들은 아들이다.


전에는 '딸은 딸이고 아들은 아들이다'는 말이

부정하고 싶은 말 중 하나 였는데

그래도... 딸은 딸이고 아들은 아들이더라.


이런 아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그 누가 감당하리오.


우리나라 선조들께서는

이런 아들들의 기질을 미리 예견하시고

태권도를 설계하셨나보다.

관장님...

저희 아들을 감당해주시옵소서...


하지만 피그는

태권도를 결사반대했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관장님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을 들은 뒤로,

피그에게 태권도장은

어느새 공포의 성지가 되어버렸다.


다른 지역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나의 남동생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하고,

피그를 달래보고, 협박도 해봤다.

그러나 피그의 마음은 웬만한 철옹성보다 단단했다.


그렇게 실랑이 하기를 몇 날 며칠.

마침내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단 한번의 체험만! 싫으면 다시는 안 시킨다!"

라는 조건부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서야

도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관장님께 미리

"아이가 도장을 무서워해요"

라고 살짝 말씀드려놓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도장 문을 열었다.


마침 그 날은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날이었고

피그는 처음 보는 친구들, 형님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피그의 첫 태권도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엄마의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단 한번의 체험이면

피그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릴 거라는 걸.


정확히 예상적중.


준비운동을 하고

한참 피구를 하던 피그는

갑자기 내가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 창가로 달려와

시뻘개진 얼굴로

쌍따봉을 날린다.....


"어머니.. 누가 제일 잘 노는 것 같으세요?"


네 관장님... 저도 보여요....


안도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얼굴로

관장님과 상담을 마친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10점 만점에 100점"이라는

피그의 태권도 감상평과 함께.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피그는 누구보다 일찍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치원 선생님께 드리는

자체 하원 동의서.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안 다니겠다고 한 분이?


며칠 더 체험해보라고 권유해주신

관장님의 배려 덕분에

피그는 유치원에서 하원하자마자

태권도 차량을 타고 도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뭐지?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아침마다 "엄마 오늘 최대한 일찍 와!"를

열 번은 외치며 나를 배웅해주던 녀석.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라는 말을 앞세워

나를 놀이터로 끌고 가던 녀석이

저녁 6시가 넘도록 학원에 가 있다...?

분명 '소리 벗고 팬티 질러!'상황인데

왜 이러지....?


설마...

나 지금...

분리불안?

사실 많은 엄마들이

아이에게 분리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온 우주이지만,

엄마도 아이에게 의지하고

어느새 기대며 살아간다.


아이를 키우는 궁극적인 목표는

'자립'인데,

정작 나는,

그 아이에게서 쉽게 독립하지 못한다.


이런 감정이 오래 이어지기도 한다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건만,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내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겨우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한 걸 가지고

뭘 이렇게 거창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는지

나 역시도 당황스럽다.


아마 나 역시

엄마로서 자라는 중이기 때문일까.


괜히 빨래를 한번 더 돌리고

미뤄뒀던 텀블러 고무마개를 소독해본다.


그렇게,

아이의 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나 본다.




(에필로그)


"엄마... 나 그냥 태권도 다니지 말까?"


두번째 체험을 마치고 온 피그가

저녁밥을 먹은 후 소파에 앉아 쉬다가

문득, 세상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

아니 어제보다 더 재밌었다며....


물론 엄마도 네가 보고 싶고,

네가 없는 시간이 허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번복은 안 되지!!


나는 피그보다 더 슬픈 눈으로 되물었다.

"왜...?"


피그의 대답을 듣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다.


"태권도 갔다 오면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

그러니까 밤이 더 빨리 와."


요즘 어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피그는

주말에도 창문을 내다보며

"지금 저녁이야? 이제 곧 밤 되는 거야?"

라고 묻곤 했다.


오 마이갓.

비상사태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렇긴 하지" 라고 말하고

피그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또다시 더딘 시간을 보냈다.


이때 경거망동은 금물!

침묵과 기다림의 미덕을 발휘해야한다.


잠시 후,


"근데 엄마!

태권도에 있을 때는 진짜 신기하게

엄마 생각이 하나도 안 났어!"


....휴

그래.


엄마도 이제 치료됐어^^


피그야,

우리 열심히 다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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