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였구나
방학 전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피그가 갑자기 내 옆에 와서
"엄마!
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잖아.
그리고 그럼 또 방학이지!
그러니까 엄마도 하루만 잘 버티고 와
알았지?
엄마 내가 사랑해~~~"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눈으로
웃어준다.
잠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 녀석,
오늘은 왜 이리 대사를 잘 쳐?
나도 덩달아 이불속에서
피그랑 얼굴을 비비고,
"엄마가 더 사랑해~
우리 내일 힘내보자!" 하며
꽁냥꽁냥
찐 텐션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데...
문이 스르륵 열린다.
.....
랑이 등장.
한 손은 허리에 척!
다른 한 손은 우리를 향해 날아드는
지적의 손가락.
그리고 짐짓 낮고 위엄 있는
표정과 목소리로 말한다.
"조용히 해라...."
정적.
아니, 뭐라고?
너무 웃기고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하고 외쳤더니
랑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뚫어지게 노려보며
"말.. 예쁘게 해라....-_-^"
..................
순간,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많이 본 것 같은 그 표정과.. 말투......
어, 저거.....
나잖아?
그렇게 나는
내 딸에게 빙의된 '나'에게
훈계당하는 경험을 했다.
(생일 케이크 겨우 3개 분량의
연륜에게 찍소리도 못 함..)
정신이 멍해진 나는
피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어이없어 한참을 웃었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나도, 남편도 아닌
'나를 빙의한 랑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이를 잘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아이가 자랐으면 하는 모습대로
부모가 먼저 살아가는 거라던데....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로 자라길 바랐더니,
말을 예쁘게 하라고 말하는 아이로 자라 버렸네...
하하하...
이제는 무슨 말만 꺼내면,
랑이는 날 노려보며 말한다.
"말.. 예쁘게 해라"
명색이 유치원 교사인데....
육아 참... 잘 굴러간다... 하하
아이들이 점점 자란다는 건,
내 모습이 그들 안에 조금씩
새겨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내가 가르치던 입장이었는데
이젠 나를 흉내 내고, 닮아가고,
가끔은
나보다 더 어른스럽게 나를 다독인다.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웃기고,
가끔은 울컥하며 벅차오른다.
내가 지치지 않도록,
힘내라고 말해주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그들이 자라 갈수록
나는 조금씩 작아지고,
작아지는 나를
아이들이 커다란 품으로 감싸주는 느낌.
밤이 오고,
아이들이 잠에 들어 고요가 찾아올 때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시절, 나도 참 사랑받고 있구나'
먼 훗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굳이 핸드폰을 뒤적이지 않아도
그때 그 눈빛과 웃음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또렷이 피어오르도록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더 자주 눈을 맞추고,
더 다정한 미소를 건네기로 한다.
오늘 피그가
'엄마는 사랑받는 사람이야'라고
느끼게 해 준 것처럼,
아이들 또한
나의 눈빛만 보아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들
말...
예쁘게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