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에게 정권을 뺏긴 어느 엄마의 기록
#1.
하루 종일 놀다 지쳐도
밤만 되면 랑이는
두 번째 하루를 시작한다.
공주 옷을 입었다 벗었다,
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꺼내다
자는 아빠를 촬영하고...
그 작은 몸으로 집 안을
조용히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러다 어김없이
"엄마...."
"목말라요..."
"엄마... 혼자 가기 무서워요..."
"엄마아....."
몇 번을 불러도 대답 없는 나에게
비장의 한마디를 꺼낸다.
"어머니....
목말라요... 물 좀 떠주세요..."
공식 명칭은 어머니,
비공식 직함은 말단 수행비서.
랑이는 이미
어머니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2.
우리 집 거실 한복판.
랑이와 아빠는 오늘도 로맨스물 촬영 중이다.
"왕자님~ 여기 보세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아빠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 랑이
그 광경을 본 나는,
참을 수 없이 현실감에 젖어 한마디 툭.
"우리 집에 왕자가 어딨어"
그러자 랑이는
그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아주 당연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아빠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왕자잖아."
왕자는 계급이고 뭐고 없는
그저 랑이의 놀이 속 소품 1호
아빠의 눈에서,
순간 먼 산을 바라보는 표정이 스쳤다.
"네가 왕자지? 그렇지?"
확인사살까지 잊지 않는다.
신분 상승 5분 만에 몰락한 왕자.
그것도 딸 손에.
#3.
아이들이 하원한 어느 저녁,
오랜만에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카페에 갔다.
빵도 사고, 주스도 고르고,
아이들과 스티커북을 펼치며
꽁냥꽁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자리의 할아버지.
혹시 랑이만 한 손녀가 있으신 걸까?
내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랑이를 지켜보시는데,
그건 엄마미소도 아빠미소도 아닌
정통 K-할아버지 미소였다.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워질 즈음,
일행이 오셨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자리를 옮기셨고
우리는 이제 진짜 여유를 즐겨볼까 하던 그때,
할아버지께서 접시에 꽈배기 하나를 담아
우리 테이블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랑이에게 한마디.
"아가야~ 이거 먹어봐~ 아이고 예뻐라~"
나와 카우씨가 급히 사양했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쿨하게 돌아서셨다.
(한국인은 삼세번 거절이 국룰인데
거절을 단박에 거절당했다.)
평소엔 빵에 관심도 없던 랑이가
어찌 된 일인지
꽈배기를 맛있게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던 중,
할아버지를 향해 상큼 미소까지 발사하는
팬서비스를 잊지 않는다.
(타고난 사회생활러... 엄마아빠보다 낫다...)
그렇게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카우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꽈배기 할아버지, 테라스에 나와 계셨거든.
랑이 노는 거 보시더니 나한테 말을 거셨어."
"아이에게 뭘 가르치려 들지 말고 사랑만 듬뿍 주면 돼."
"아이들은 똑똑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 이거 뭔가 멋있다.
육아서에서 늘 말하는 '있는 그대로'바라봐 주기.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할아버지께서는 이론을 증명하시려는 듯
즉석 실습에 들어가셨다.
랑이가 테라스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서 다가가 조용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가야, 눈을 감아봐.
뭐가 보이니?"
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감성 충만한 상황에서
랑이는 뭐라고 했을까.
"랑이가 뭐라고 했는데???"
내가 잔뜩 기대하며 묻자,
카우씨가 웃으며 답했다.
"눈
감기
싫어요."
.... 아 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아직 마음보다 눈으로 세상을 배우는 중이라서요..
다음엔 준비시키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도 오늘 할아버지 덕분에,
꽈배기와 함께 중요한 걸 배웠어요.
사랑만 가득 주면 된다는 말,
오래 기억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