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행복한 날이 제일 많아.
어느 날, 책상 앞에 앉아 서툰 손으로 글을 끄적이고 있는데 피그가 다가와 물었다.
"엄마, 뭐 해?"
잠시 망설이다가 부끄럽지만 고백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어. 이제 엄마도 작가야."
몇 개의 글을 보여주자 피그는 가만히 페이지를 훑었다. 그 작은 눈빛 속에 무슨 생각이 스쳤을까.
며칠 뒤, 하루가 유난히 무거웠던 날.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고 나서 죄책감에 빠져 있었는데, 피그가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
"엄마, 감정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오늘을 써보는 건 어때?"
"감정의 영화?"
"응. 오늘은 기분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잖아."
"그렇지.."
근데 엄마,
그래도 행복한 날이 제일 많아.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네가 있어, 내 하루는 결국 행복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걸.
그래서 오늘, 네가 만들어준 이 많은 '행복한 날'들에 대해 기록하려 해.
엄마 뱃속에 처음으로 네가 찾아온 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어. 초음파 화면 속에 아기가 있다는데,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없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지. 가끔 네가 뱃속에서 신나게 발을 찰 때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걸 조금씩 느꼈어.
네가 태어나고, 아주 작은 몸이 내 가슴 위에 올려졌던 순간을 아직 기억해. 많은 엄마들이 첫 만남에 눈물을 흘린다지만, 미안하게도 그때의 나는 '모성애'가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어. 그저 너무 작아서, 손끝 하나 대는 것도 조심스러웠을 뿐이야.
네가 세상에 나와 첫 목욕을 하고 다시 내 품에 안겼을 때, 그 순간의 마음을 표현할 단어는 세상 어디에도 없더라. 보석? 보물? 아니면 빛과 소금? 아니, 그 어떤 것으로도 널 빗대어 표현할 수 없어. 너는 엄마가 처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하다'고 느낀 존재야. 아마 네가 아무리 헤아리려 해도, 그때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을 거야. 그만큼 너는, 엄마에게 말도 안 되게 특별한 존재니까.
널 키우며 사실 엄마는 많이 힘들었어. 엄마의 친구들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주변에 아기엄마도 많지 않아서 어떻게 너를 키워야 하는지 늘 서툴렀지. 아빠와 함께 10평 남짓한 집에서 너를 애지중지 품에 안고 살던 날들. 그땐 '내 인생에 가장 힘든 시절일 거야'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이 너무도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이 되었어. 그 안에 네가 있었으니까. 하루의 시작과 끝이 모두 너였고, 너를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힘듦마저 사랑이 되었으니까.
네가 뒤집기를 하고, 배밀이를 하고, 기고, 서서 걷기 시작하던 순간. 처음 "엄마"라고 불러주던 그날. 넌 짐작할 수 있니? 그 모든 순간이 엄마를 얼마나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는지. 너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말이야.
네가 자라서 혼자 글을 읽고 깨우치며 책 속 세상과 대화하는 아이가 되었어. 엄마와도 제법 그럴듯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 어느 날, 엄마가 책을 읽다 인상 깊었던 문장을 너에게 들려주었어. 사냥꾼이 사슴을 만났을 때 그 사슴이 엄마 사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였지. 그 답은 이랬어.
아기를 지켜야 하는 엄마사슴의 눈빛은
호랑이의 눈과 같다는 것
엄마는 그 이야기를 하며,
"엄마는 너를 꼭 지켜주는 사람이야."
라고 말했는데, 네가 되려 이렇게 말했지.
"내 목숨을 잃어서라도 엄마를 지켜줄 거야."
그 말이 너에겐 그냥 스쳐간 한마디였을지 몰라도, 엄마에겐 오래 마음에 남을 만큼 벅찬 순간이었어.
내년이면 너는 초등학생이 되고, 엄마보다 더 중요한 관계와 상황들이 생기겠지. 네가 어떤 아이로 자라게 될지, 엄마는 궁금하고 또 기대돼. 엄마를 닮았지만, 엄마보다는 더 멋지게 살길 바라. 무엇보다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으로 밝게 자라주면 좋겠어.
그리고 먼 훗날, 이 글을 함께 읽는 날이 오면 우리가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그렇게 자랐네, 참 잘 자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