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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우 Mar 26. 2022

불멸의 연인을 다시 생각하다


이전에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30번에 관한 글에서 그 작품들이 모두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불멸의 연인'의 유력한 후보로는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부인이었던 안토니 브렌타노(Antonie Brentano)와 헝가리 백작 부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vik)의 딸로서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친 요제피네 브룬스비크(Josephine Brunsvik) 두 사람으로 좁혀진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위의 두 여인 가운데 안토니 브렌타노는 레코드사 뱅가드의 설립자인 솔로몬의 연구 결과를 통해 불멸의 연인으로 거의 확정되는 듯했습니다만, 최근의 연구 성과를 종합해보면 불멸의 연인의 주인공은 오히려 요세피네 브룬스비크 쪽으로 거의 기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두 여인을 둘러싼 복잡한 진위 공방은 관심있는 학자들에게 맡겨 두고, 아래에서는 베토벤의 다양한 음악 작품에 투영된 불멸의 연인의 그림자를 좀더 자세히 추적해보고자 합니다.







안단테 파보리






최근에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베토벤 후기 피아노 소나타 3곡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의 맨 앞에 베토벤의 '안단테 파보리(WoO 57)'를 연주한 것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3곡은 모두 불멸의 연인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진 곡인데, '안단테 파보리'라는 작품은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그 공연의 맨 처음에 이 곡을 연주하였던 것일까요?



안단테 파보리는 원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의 2악장으로 작곡했던 곡인데 주위에서 곡이 너무 길고 다른 악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자 따로 소곡으로 출판을 한 곡입니다.



론도 형식과 변주곡 형식이 결합된 이 독특한 작품은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서도 (좋아한다는 뜻의 favori라는 이름 그대로 당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입니다.



https://youtu.be/fIYJYJCgCkw






그런데 적지 않은 분들이 놓치는 것은 베토벤이 이 곡을 (불멸의 연인의 유력한 두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인) 요제피네에게 선물하면서 '너의 안단테'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안단테 파보리의 도입부의 주제(요제피네의 주제)는 아래에서 살펴보는 것처럼 그 후 1810년에 작곡된 현악사중주 '세리오소'나 1816년에 작곡된 가곡집 <멀리있는 연인에게>를 거쳐 베토벤 후기 피아노 소나타 30번 3악장 변주 등 매우 다양한 작품들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요제피네는 어떤 경위로 베토벤의 삶과 작품에 그렇게 깊이 들어오게 된 것일까요?







선생과 제자






요제피네는 그의 4살 연상 언니 테레제와 함께 1799년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던 베토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배우게 되면서 서로 알게 됩니다. 베토벤은 그 두 자매를 매우 아낀 것으로 전해집니다. 베토벤은 이 두 자매에게 피아노 연탄 변주곡 'Ich denke dein(WoO 74)'을 작곡하여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https://youtu.be/nAY6RfXMRo8






베토벤은 두 자매 가운데 요제피네를 특히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시절에 작곡한 작품 가운데는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이 느껴지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세피네의 집에서 자주 연주했던 베토벤의 많은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하나인) 바이올린 소나타 8번 op 30-3과 (베토벤이 1804년 출판 후 가장 먼저 요세피네에게 보낸) 우아한 춤곡 미뉴엣이 포함된 피아노 소나타 작품 op 31-3 등이 눈길을 끕니다.



https://youtu.be/Pz9UHnHyk4Y






특히 바이올린 소나타 8번의 미뉴엣은 훗날 (불멸의 연인과 관련된) 피아노 소나타 op 110의 1악장의 주제로 그대로 차용되었는데, 이 미뉴엣에서는 사랑에 푹 빠진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납니다.



https://youtu.be/iRffmEoa94A?t=620






그리고 안단테 파보리를 2악장으로 한 발트슈타인도 이 즈음에 작곡이 되었는데, 사랑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 안단테 파보리는 말 할 것도 없고 발트슈타인 소나타의 1악장 도입부 주제조차도 뭔가를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의 맥박이 느껴진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https://youtu.be/k0m18rzfYAk






이처럼 베토벤이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브룬스비크 가문의 요제피네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요제피네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27세나 연상인 다임 백작과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베토벤의 성격상) 사사로운 감정으로 발전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설령 속으로 그러한 감정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를 바깥으로 드러내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희망에 붙여






그런데 요제피네의 남편 다임 백작이 1804년 갑작스럽게 폐렴으로 죽으면서 베토벤과 요제피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베토벤은 가곡 ‘희망에 붙여(An die Hoffnung)’ op 32를 선물하며 요제피네에게 그녀를 향한 자신의 ‘희망’을 드러내놓습니다.



https://youtu.be/y78xBsFC0Yc






아울러 발트슈타인 소나타에서 떼어 내어 별도로 출판한 우아한 주제의 ‘안단테 파보리’를 “너의 안단테”라고 하며 요제피네에게 보냅니다.



요제피네는 이렇게 자신에 대하여 작품을 공개적으로 헌정하려는 베토벤의 다소 저돌적인 시도를 조심스럽게 거부하였지만, 베토벤은 요제피네가 당시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오페라의 이상적인 여주인공 레오노레와 같이 자신을 곤경에서 구원해줄 천사처럼 여기고 그녀와의 결혼에 대한 ‘희망’을 가집니다.














흔히 ‘명작의 숲’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는 (마치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을 하던 해에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듯이)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4번, 교향곡 4번, 현악사중주 ‘라주모프스키’, 피아노 소타나 ‘열정’ 등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서도 더욱 빼어난 걸작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교향곡 5번, 6번 등의 구상도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기에 작곡된 곡 가운데 특이하게도 미뉴엣으로 시작하는 피아노 소나타 F major op 54 역시 안단테 파보리의 감정이 연장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https://youtu.be/bbB6aqHGuKM






깨어진 관계와 상처






그러나 요제피네에 대한 베토벤의 즉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요제피네는 베토벤과의 결혼을 거부합니다. 이는 자녀들의 양육에 대한 요제피네의 걱정과 브룬스비크 가문의 반대로 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요제피네는 1807년부터 에스토니아 출신 귀족 Stackelberg와 교제를 시작하고 1808년에는 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의 베토벤의 작품들을 보면 코리올란 서곡과 같이 격정적이거나 첼로소나타 3번과 같이 탄식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특히 첼로소나타 3번의 경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에 나오는 (바흐의 요한수난곡의 아리아 ‘다 이루었다(Es ist vollbracht)’에 기원을 둔) 탄식의 노래가 중간에 등장하는 것이 매우 특이합니다.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는 루돌프 대공에 헌정된 ‘고별’ 소나타 역시 이 시기에 작곡되었습니다.



https://youtu.be/HjiIUOKUJpk?t=417






그리고 베토벤의 가곡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 어두운 무덤 속에' WoO 133도 이 시기에 작곡되었는데, 당시의 베토벤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곡입니다.



https://youtu.be/EB29aSpZFnM






In questa tomba oscura


Lasciami riposar;


Quando vivevo, ingrata,


Dovevi a me pensar.



Lascia che l'ombre ignude


Godansi pace almen


E non, e non bagnar mie ceneri


D'inutile velen.



이 어두운 무덤에


나를 눕게 해주오


내가 살아있을 때, 무정한 사람아


그 때 나를 생각해주었어야죠



최소한 내버려두세요 헐벗은 유령이


평화를 즐기도록


나의 재를 젖게 마세요


부질없는 독액으로



그 밖에도 이 시기에 베토벤은 괴테의 시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를 바탕으로 4개의 각기 다른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였습니다.



https://youtu.be/5umUD8Z6zrM






그리고 이 시기에 작곡된 현악4중주 가운데는 11번 ‘세리오소’ op 95가 주목을 받는데, 특히 3악장과 4악장의 도입부를 보면 요제피네에게 “당신의 안단테”라고 하며 주었던 ‘안단테 파보리(andante favori)’의 주제가 매우 고통스러운 단조의 음형으로 변형되어 나타나도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불멸의 연인과의 만남






요제피네는 자녀들의 양육을 위해 슈타켈베르크와 결혼했지만 그 결혼은 처음부터 삐걱거리다 1812년 급기야 슈타켈베르크는 요제피네를 떠납니다. 공교롭게도 1812년 7월 6일과 7일에 베토벤은 소위 ‘불멸의 연인(unsterbliche Geliebte)’에게 매우 절절한 고백을 담은 편지를 씁니다.



https://youtu.be/GuWSqTlgUvA






이것이 누구를 향한 편지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습니다만, 최근에는 베토벤이 당시 요제피네와 재회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베토벤의 작품으로는 바이올린 소나타 10번과 교향곡 8번 등이 있습니다.



그 중 바이올린 소나타는 1802년 ‘크로이처’ 이후 한 동안 작곡하지 않은 장르로서 이 곡에 담긴 잔잔한 기쁨은 마치 요제피네와의 재회를 기념하는 듯합니다.



https://youtu.be/Rcg6ZeQr3hI



그리고 당시 작곡된 교향곡 8번 역시 베토벤의 다른 교향곡과 달리 매우 우아하고 긍정적인 감정이 가득한데, 특히 우아한 트리오가 담긴 3악장 미뉴엣이나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이 담긴 4악장이 당시의 베토벤의 심증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멀리 있는 연인에게






그 후 요제피네는 1813년에 딸 미노나를 낳는데 (이전에 베토벤 소나타 31번에 대한 글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연구자들 가운데는 아래 사진의 미노나가 베토벤의 딸이라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당시 요제피네는 미노나를 돌보지 않아 주위 사람이 염소의 젖을 얻어 미노나를 양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만 유지되던 슈타켈베르크와의 결혼 관계도 1814년에 완전히 파탄이 나고 곤궁에 처한 요제피나는 수학교사 안드리안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는 등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그 후 1816년 (사실관계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베토벤과 요제피네가 다시 만났다고 추측하는 분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베토벤은 연가곡집 ‘멀리 있는 연인에게’(op 98)을 작곡합니다.



베토벤의 가곡 '멀리있는 연인에게'는 그 제목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인에 대한 사모의 감정을 노래한 연가곡집입니다. 이 곡은 ‘안단테 파보리’의 요제피네의 주제가 포함된 총 6개의 변주로 구성됩니다.



https://youtu.be/KOk7EWYbyqk






그리고 이 가곡집의 주제는 훗날 피아노 소나타 30번 3악장의 주제로 채택되는데, 특히 이 곡의 6개의 변주는 피아노 소나타 30번의 3악장의 6개의 변주와 각각 그 빠르기 표기나 박자까지 거의 일치합니다.







회한과 그리움






바닥으로 추락한 요제피네의 삶은 더이상 회복되지 않았고 남편과 자식, 그리고 테레제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요제피네는 1821년 42세의 젊은 나이로 비참한 삶을 마감합니다.



공교롭게도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의 30번 소나타와 31번 소나타가 요제피네를 위한 레퀴엠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이 곡들이 요제피네를 향한 곡인지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30번 피아노 소나타는 ‘안단테 파보리’의 요제피네의 주제가 등장하는 연가곡집 ‘멀리있는 연인에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고, 피아노 소나타 31번 역시 1악장에서 요제피네와 관련이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8번의 미뉴엣 선율을 채택하고 있는 등 연인에 대한 사모의 감정이 담겨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경우에도 1악장에서 요제피네와 결혼을 꿈꾸던 시절에 작곡된 레오노레의 주제가 등장합니다.



https://youtu.be/Rfr_7FOUFCg






그리고 (그리움과 한을 잘게 쪼개서 저 우주로 날려보내버리는 듯한 느낌의) 2악장 아리에타에서도 역시 느린 미뉴엣 리듬에 의한 안단테 파보리의 요제피네의 주제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https://youtu.be/A6sUIWBlr4E






여성적이고 우아한 춤곡 미뉴엣은 그의 마지막 피아노 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벨리 변주곡의 마지막 변주를 장식하고, 그의 마지막 피아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6개의 바가텔 op 126의 마지막 안단테 아마빌레 에 콘 모토(andante amabile e con moto) 역시 미뉴엣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시작과 끝에서 모두 안단테 파보리의 요제피네 주제가 어른거리는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요?



디아벨리 변주곡 마지막 변주 https://youtu.be/vCXS1kS-3HI






바가텔 op 126 https://youtu.be/n-dS6kUcvIw?t=712






아직도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인이 누구이든 간에 베토벤이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남긴 연인이 분명히 존재했었고 그들의 사랑은 불행하게도 이생에서 부부의 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사실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베토벤의 많은 작품들의 이면에는 불멸의 연인의 집요한 그림자가 마지막까지 어른거린다는 점입니다.



흔히 베토벤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자신에게 닥친 가혹한 운명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는 강한 이미지의 그를 머리 속에 떠올리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의 많은 작품의 이면에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 고통스러워하며 평생 사무치는 그리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 한 남자의 은밀한 내면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러기에 더욱 오고오는 세대의 많은 분들이 그의 음악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괴로움을 알리라!


홀로 떨어져


모든 기쁨을 멀리한 채


저 멀리


창공을 바라보네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아는 님은


저 먼 곳에 있어


머리는 어지럽고


가슴은 타는구나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괴로움을 알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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