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살구

by 마당넓은 집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교실 앞에서 선생님은 고개 짓으로 박자를 맞추며 풍금의 건반을 누른다. 잠시 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풍금 소리에 맞춰서 소년이 노래한다. "복숭아꽃, 채송화 꽃," "다시" 선생님의 호령소리가 이어졌으나 복숭아꽃, 채송화 꽃은 계속 되었다. 살구꽃이 기억나지 않던 그 친구,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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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 어디에나 살구나무가 있었다. 이른 봄, 보리가 익어 갈 때면 누런 살구가 툭, 툭, 보리밭 사이로 떨어졌다. 채 익기 전, 아이들은 몰래 살살 나무를 흔들었다. "이놈들, 아직 익지도 않은 것을 왜 그러냐?" 주인 할머니의 벼락같은 고함이 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설익은 살구를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걱정 섞인 호통을 들었으나, 먹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몰래 따서 먹던 살구는 설익어도 맛났다.


살구는 고향이고 추억이었다. 모든 것이 풍성한 세월이 왔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진귀한 과일들이 백화점 뿐 아니라 가까운 마트까지 진열되어 있다. 철을 가리지 않고 딸기, 수박도 맘껏 먹을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예전에 흔하디흔하던 그 살구는 귀한 과일이 되었다. 어쩌다 시장과 백화점에 귀퉁이에 잠시 눈에 띄다 사라질 뿐이었다.


시골집 장독대 곁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주변에 둥글게 돌담을 쌓고 잘 자라도록 거름도 주었다. 핑크색 송엽국도 곁에 옮겨 심었다. 어서어서 자라서 맛나는 살구를 안겨주는 날을 기다렸다. 아이 키만 하던 나무는 삼 년이 지나자 꽃을 피웠다. 검붉은 장독 위에 앙증맞게 봉오리를 물고, 꽃 분홍 새색시 같이 왔다. 쳐다만 봐도 가슴 설레는 살구꽃이 피었다. 5월 말 작은 가지에 다섯 개의 살구가 익어갔다. 그 모습이 기특해서 농익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차마 따기가 죄스러웠다. 식구들이 아끼듯 하나씩 나눠 먹었다.


나무는 점점 자랐다. 올해는 장독에 그늘을 만들고 꽃 분홍 꽃비를 내리며 봄을 알렸다. 햇살이 뜨거워 모자를 찾을 여름 초입에 살구는 노랗게 익어갔다. 신품종이라 어린아이 주먹만큼 클 거라던 묘목상 주인의 말처럼 정말로 탐스러웠다. 반쪽은 빨간 물감을 칠한 듯 붉었다. 쳐다만 봐도 저절로 입에서 침이 돌았다. 잘 익은 살구를 골라 반으로 쩍 갈라 씨만 발라내고 먹었다. 신맛은 살짝 지나가고 상큼하고 단맛이 고급 지다.


유난히 살구를 좋아하는 큰오빠와 막냇동생이 목에 걸린다. 신 음식은 흔히 여자들이 좋아하는데 오빠는 유난히 신 것을 좋아한다. 딸 다섯에 하나밖에 없는 오빠다. 맛나고 귀한 음식을 보면 먼저 생각이 난다. "오빠, 살구 좋아해, 살구 보내줄까? " "보내주면 고맙지." 괜히 알면서 놀리듯 묻는다.


낮은 한여름 같은 날씨다. 연신 땀이 흘러내린다. 목에 수건을 걸고 창 모자도 썼다. 높은 가지는 나무에 오르기도 하고 막대기를 뻗는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도 나눠 먹을 생각에 힘든 것을 잊는다. 상자 두 개를 준비하고 제일 크고 잘 익은 것은 오빠, 다음 것은 동생 몫으로 담는다.


큰 상자를 골랐더니 공간이 조금 빈다. 밭에서 캔 감자도 몇 개 넣고, 지난 주 만든 딸기잼도 한 병씩 넣으니 얼추 공간이 들어맞다. 괜히 마음이 으스대듯 뿌듯하다. 연신 땀을 닦으며 상자를 싣고 이웃 마을 택배 화물 관리하는 곳으로 갔다. "살구니까 조심해서 다뤄주세요. 좀 빠른 택배로 보내주세요." 부탁도 잊지 않는다.


"언니, 살구 왔어. 살구가 너무 커, 맛있겠다. 잘 먹을게. 감자도 있네. 고마워“ 서울 사는 막냇동생의 전화다. 그런데 원주에 사는 오빠는 기척이 없다. 어! 안 갔나? 왜 연락이 없지. 궁금하지만 괜히 생색내는 듯하여 기다린다. 살구는 생물이라서 이 더운 날씨에 물류 저장고에 하루 더 지새면 짓물러질 텐데 걱정이다.


다음 날 아침나절이 지나서야 가족 단톡에 "딩동' 알람이 울린다. '살구가 다 깨져서 성한 건 일곱 개 뿐이네‘ 앞뒤 말없이 한 줄 남긴 오빠의 글. 순간 서운함이 성큼 내 안에 들어와 앉는다. 힘들게 오빠가 좋아할 얼굴을 상상하며 보냈는데.

"언니! 감자 삶았는데 너무 맛나다. 오늘 아침 언니 보낸 감자로 아침을 먹었어. 보송보송 수미감자야. 그리고 살구는 몇 개 깨진 것은 깨끗이 씻어 먹었어. 너무 맛있어. 고마워." 동생이 다음 날 아침 다시 톡으로 인사를 보냈다. "나는 아침 내내 살구씨 빼내서 음식 쓰레기통에 버리는 중." 연이어 오빠의 톡이올라온다. " 오빠, 미안해. 괜한 일거리를 만들어서. 앞으로는 귀찮은 일 만들지 않을게." 나는 즉시 화답을 보냈다.


언제나 아버지 같은 오빠였다. 아버지 보듯 오빠를 보았다. 살구는 내 마음이었는데 분리수거하는 한낱 쓰레기가 되었다. 가슴에 못이 되어 한동안 가슴이 아팠다. 못이 계속 꿈틀거렸다. "너희 오빠가 말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래." 큰언니의 말이다.

마침 올케언니는 여행 중이라 했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택배는 이틀에 걸쳐 도착했고 그날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오빠는 다음 날 아침에 개봉했다. 살구는 짓무르고 초파리가 생겨있었다. 마침 막냇동생의 톡이 올라왔고 그때의 상황을 아무 여과 없이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다. 후일 전해 들은 그날의 상황이었다.


오빠도 나와 같이 상처를 입었다. 무심히 상황을 전했다가 동생에게 대비없이 찔린 셈이다. 그러나 아프다고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마음속에 상처를 품고 침묵하였다.


추석이 되어 가족 모임에서 다시 만났다. 술잔을 앞에 두고 오빠가 먼저 사과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근데 네가 말할 틈을 안 주더라." 시간이 지났고 그때의 땀은 이미 말랐다. 나도 예민하게 반응했음을 인정했다. 그 상큼하고 달달한 살구가 못이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사소한 일이 커다랗게 회오리가 되어 태풍의 눈을 만들고, 집 전체를 들어 올리는 허리케인이 되기도 한다. 그때의 살구가 나에게는 허리케인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오빠가 만들어낸 커다란 태풍이었다. 그날 30도의 뜨거운 햇살이 없었고, 땀방울이 목덜미를 흘러내리지 않았더라도 오빠의 말이 못이 되었을까. 상황을 핑계 삼아 행동의 책임을 덮으려 조각들을 맞춰 보지만 그 상황이 결코 전체를 덮을 수는 없었다.

살구나무에도 봄이 찾아왔다. 올해는 어쩐지 살구꽃이 피지 않았다. 주변을 환히 비추던 살구꽃은 간신히 살았음을 알리듯이 듬성듬성 꽃이 피었다. 마치 숲에 막 자란 개 복숭아꽃 같았다. 5월은 왔는데 살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철없던 오누이의 시시비비에 올해는 침묵으로 반성문을 받아내려는 자연의 가르침으로 겸허히 받아들인다.


어느 날 무심히 장독대에서 올려다 본 살구나무 사이에서 대여섯 개의 살구가 보였다. 반성과 용서를 동시에 안겨주는 마음이 든다. 마치 처음 살구가 열매를 주던 그때처럼, 오빠와 나의 철없던 투정은 잊고 다시 꽃 피고 열매 맺던 그때로 돌아가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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