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배고개

by 마당넓은 집

언니네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엊그제 같은 데 벌써 30년 전 일이 되었다. 버스를 한 시간 이상 타고 가야만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정류장 곳곳에 서고, 타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졸다 하면서 하단을 지나면 드디어 배고개가 나온다. 고개 넘어 언니가 살고 있는 신평마을이다. 시골에서는 읍내 가는 시간보다 훨씬 먼 길인데 도시에서는 같은 구역의 이름이다. 시골 사람들은 같은 부산이라 서로 가까운 줄 안다.


고등학교 졸업후 부산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두 언니가 부산에 살았고 그중 작은 언니가 살던 곳이 신평이었다. 나는 부산이 엄청 큰 도시로 알고 왔었다. 그런데 버스가 하단을 지나 배 고개 언덕을 돌아 오르면서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 완전 시골 동네였다. 배 고개 언덕에 신평로 교회가 하늘 교회처럼 커다랗게 있어 시골과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버스 노선도에 배고개 라고 적혀있어서 옛 마을같이 무슨 전설이라도 숨겨져 있을 것 같아서 좋았다. 예전엔 이곳이 바다였나! 그런 생각을 하였다. 허름한 농가 주택도 몇 채가 있고 농사를 짓는 밭도 있었다. 소 울음소리도 한 번씩 들렸다. 고향 마을만 같아 고개를 넘을 때면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버스고개를 힘겹게 오르면 바로 마을이 나타났고 119 소방서가 보였다. 소방서에 걸려있는 태극기가 방향을 가르키는 푯대가 되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면 되었다.

신평마을은 초입에만 주택이 모여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대부분 중·소공장들이 도로 양쪽으로 줄지어 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흔히 만났고 작은 형부도 그곳 중 한 곳에서 일을 했다.


버스에서 내려 몇 발만 걸으면 바로 골목 안에 언니가 세 들어 사는 단층 양옥집이 나왔다. ㄷ자형 구조로 이어 붙여 세를 주기 위해 지은 집이었다. 언니네는 다락이 있는 방두칸에 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언니 집 말고 주인집과 다른 한 집 더 살았다. 대부분 인근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부엌 미닫이문이 주 출입문으로 되어있었고 다들 부엌문을 활짝 열어두고 제 집처럼 드나들 듯하며 살았다. 이웃들도 스스럼없이 들어와 뉘 집 동생이냐면서 마치 제 동생 대하듯 이야기했다.이야기가 길어지면 우리 동생 있는데 하면서 은근히 남동생 소개도 시켜주려 달떠 있었다. 옆집 저녁 반찬이 무엇인지 그 집 아저씨가 퇴근길 사 온 과자도 통닭도 다들 나눠 먹었다. 나는 주책이다 싶었 한발 거리를 두려 했지만 그 작은 집에서 언니는 아들, 딸 낳고 형부와 재미나게 살았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인가 싶다. 배고개가 조금씩 넓어졌다. 고갯길 능선도 조금씩 낮아졌다. 소 울음소리도 그쳤다. 등선 밭은 콩도 옥수수도 사라지고 잡초들만 무성히 자라났다. 시골 풍경은 흔적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굴착기 소리들이 요란하더니 붉은 흙 바닥을 보였다. 고층 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언니 집을 찾아가는 길이 어려워졌다. 어쩌다 가는 언니네 집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찾을수 있었다.


얼마 뒤 언니는 하단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언니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 당시에 2억이나 되는 큰 돈을 상속 받았다. 방 3칸이 있는 집에 이사를 오니 조카들은 각기 제 방이 생겼다. 거실에 커다란 텔레비전도 놓였다. 형부는 작업복을 벗고 멋진 슈트로 갈아입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고 했다.

자주 집을 비웠다. 동남아로 원단을 수출하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인도네시아로 자주 드나 들었다. 귀국해서는 잔뜩 선물을 사 가지고 다시 출국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인도네시아에 아주 사업체를 옮기면서 집에는 일 년에 한두 차례 손님처럼 다녀갔다.

“ 인도네시아 한번 다녀오세요. 남편 혼자 너무 오래 있어요.”형부의 친구들이 지나가는 소리처럼 언니를 등떠 밀었지만, 언니는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할 뿐이었다. 남편을 믿고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아이들은 한해 두해 자랐고 엄마의 손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사업이 힘들다, 사업을 더 크게 벌린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며 생활비도 건너뛰며 보내왔다. 언니도 함께 돕기 위해 작은 식당을 차리고 일했다.


조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아이들도 언니도 바빴다. 형부의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했고 친정엄마가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언니가 엄마를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하였다. 인도네시아에 조카들의 이복동생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결별을 예고한 소리였다. 얼마 뒤 예견된 듯이 언니와 형부는 이혼하였다. 배 고개를 떠나온지 십 년도 안된 시간에 생긴 일이었다. 언니는 혼자서 식당을 하면서 두 아이를 키워냈다. 아이들도 제 알아서 크듯이 자랐다.그러나 우리들은 알고 있었다. 몸집만 어른같이 클뿐, 언니도 아이들도 점점 메말라갔다는 것을, 닿으면 바사삭 부서질 듯 위태로와 보였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쯤 언니는 새 남자를 만났다. 언니와 같은 경험을 가진 남자라고 하였다. 말이 없는 모습과 순하디 순하게 생긴 모습은 마치 예전 형부를 보는 듯하였다. 사람이 좋아보였는데 그 닮은 느낌은 어쩐지 경계되었다. 두 사람은 생기를 찾았다. 마른 잎사귀에 생기가 돌아보였다. 행복해 보였다.동생들은 언니를 위하여 간소하게 자리를 만들어 인사를 나누고 가족으로 맞이하였다.그 후부터 가족모임에 참석하였고 함께 여행도 다녔다.해마다 여름이면 고향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겼다. 우리들은 모두 오래된 형부처럼, 스스럼없이 언니의 남편으로 인정하였다. 가족들과도 잘 어울렸고 언니도 잘 맞는 듯하였다. 그러나 문득문득 비치는 옛 형부와 닮은 듯한 그림자가 마음속에 꺼림직하게 남았다.


12월 어느날 예고없이 언니가 엄마를 찾아 왔다. 검은 봉지에 귤을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갑자기 웬일이고." 엄마는 갑작스런 언니의 방문에 반색을 하였다. “엄마, 김 서방 가방 들고 집 나갔어.” “뭔 소리고.” 엄마가 놀라면서 물었다. “ 아니 잠깐 말다툼했는데 잠시 나가 있는다 하더라고 그래서 나가라 했지! 그랬는데 보름이 지나도 기척이 없네.” 의연함을 포장했지만 언니의 모습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이미 얼굴은 생기가 반쯤 나가있었다. 5년 동안 같이 살았다. 결코 아이들 장난 같은 시간이 아니었는데 말다툼 후 집을 나갔다.그 후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아무렇치 않은 척 행동했지만, 언니가 새 형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기에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기다리면 올꺼야? 이런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유독 우리 형제 중에서 가장 모 난 성격이었다. 우리가족들과 성향이 틀렸다고 표현하는것이 옳다.학창 시절부터 놀기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했다. 엉뚱한 짓도 많이 해서 어른들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그래도 인정도 많고 재주도 많았다. 형제들이 모이면 웃을 일은 언제나 언니 몫이였다. 그런 언니가 두 번째 만난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속시원하게 이유라도 말하고 가야지 아무 말 없이 가방 들고 나가서 5년의 세월을 그냥 덮었다. 그 후 몇 년을 언니는 가슴에 기다림을 품고 지냈다.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는 점점 곪아 들었다. 웃음을 잃었고 모든 말에 날을 세웠다. 언니는 온 가족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말에도 꼬리를 물고 집요하게 공격하는 하이에나가 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그런 눈치를 보고 언니는 모두가 자기를 왕따시킨다고 비난하였다. 형제들이 모두 자신을 무시한다고 언제나 시비를 걸었다. 누가 봐도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 너 우울증 치료 좀 받아라. 갱년기이고 아무래도 너무 예민한 것 같아. 사실 나도 치료받았어. 우울증은 누구나 힘들 때 도움을 받는 거야. 정신병이라 생각 말고 치료받자.” 오빠가 타이르듯 여러번 설득을 하였다.

“이제는 너희끼리 모여서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네. 잘난 것들끼리 모여서 놀아. 나를 호적에서 파내고 없는 형제로 해.” 언니의 반응이었다.

이런 일들이 핑퐁 게임처럼 두어 해를 지났다. 여러 번 언니와 통화와 만남을 시도해도 언제나 언니는 성벽을 높이 쌓고 혼자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다.


배 고개를 지나가게 되었다. 예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산광역시의 또다른 신도시가 그곳에 있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예전 언니가 살던 마을을 눈으로 찾게 되었다. 그곳에도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여전한 것은 소방서의 태극기뿐, 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동네의 이름만 옛 그대로일뿐 이었다.

예전 신평 그 작은 2칸짜리 방에서 긴 치마를 펄렁이며 접시에 파전을 구워서 이웃집 부엌문을 두드리던 언니의 해맑은 웃음이 왠지 그리워진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던 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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