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분명 기다림이었다. 할머니와 엄마, 스무 살에서 여섯 살까지 두세 살 터울의 일곱 아이가 지키고 있다. 붉은 꽃 그림의 새 캐시밀론 이불속에서 검은 얼굴의 아버지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앙상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볼록 솟은 배가 들썩인다. 영혼은 이미 문고리를 잡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실낱같은 숨길이 빠져나가는 그 찰나를 지키고 가족들이 지키고 있다.
아버지는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지난 수년간 전국에 명의를 찾아 좋다는 약은 모두 구했다. 낯빛이 노란빛에서 검은색으로 변할 뿐,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희망은 절망이 되었다.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이다. 지켜보는 사람도, 병상의 아버지도 알고 있다. 검은 그림자가 여러 날 전부터 집안을 드리웠다. 피폐해지는 육신과 더해가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빨리 가시는 게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랑방 벽시계가 땡땡땡 열한 번을 울렸다. 엄마와 가족들이 모두 선잠이 들었다. 때마침 시계의 종소리에 눈을 뜬 작은오빠만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자식이 되었다. 내가 겪은 최초의 죽음이었다. 죽음이란 것을 잘 몰랐고, 단지 영원한 이별이란 것만 알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첫 발령 부서는 응급실이었다. 80년대 말, 성장이 우선하는 시대였다. 고층 빌딩이 계속해서 올라갔고 공장은 쉼 없이 돌고 돌았다. 거리에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주검을 보았다. 붙잡을 틈도, 이별의 시간도 없는 죽음이었다. 밤새 밀려드는 환자들로 응급실은 하루하루가 북새통이었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졸다가 내려다본 손톱 밑은 언제나 붉은색이었다. 붙잡지 못한 생명의 흔적이었다. 내 잘못만 같아 마냥 가슴에 핏물이 고였다. 오열하며 쓰러지는 가족들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 짧은 인생이었다. 차라리 시작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예고 없이 맞닥뜨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너무 싫었다. 벗어나고 싶었으나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그 길 위에 서 있었다.
이제는 세상도 병원도 많이 변했다. 팔순은 흔한 나이가 되었고, 얼굴만 봐서는 나이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허리도 꼿꼿하고 저마다 손전화를 들고 세상과 소통한다. 예전에 보던 주검들은 이제는 뉴스에 오르는 사건이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죽음은 무섭고 두렵다는 것이다.
간호사실이 분주하다. 지난밤 입원한 92세 남자는 고열에 의식이 혼미하고 심한 복부 통증이 있었다. 응급실에서 패혈증에 이르는 염증 수치와 고령 및 여러 위험 요인으로 응급 시술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소변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연명치료는 하지 않고 보존적 약물 치료만을 하겠다는 설명에 보호자 동의를 받고 일반병동 내 중증 병실에 입원하였다.
환자는 다복하게 9남매를 두었다. 감염예방을 위해 병실 출입은 보호자 한 명만 가능하였으나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두 명씩 번갈아 가며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니터의 경고음, 신음, 거친 숨소리,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가 이상해요. 빨리 와 주세요.” 외침은 모니터의 알람이 울릴 때마다, 보호자가 바뀔 때마다 더해졌다. 아픈 환자보다 보호자의 두려움이 더 힘들어 보인다.
임상적인 변화를 지켜보는데, 보호자는 마음마저 보태라 매달린다. 가족들과 의료인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 간호사가 마음만 보태면 환자 간호는 힘들어진다. 객관성이 흔들리면 판단이 흐려진다. 사십 명의 환자를 세 명의 간호사가 밤새 돌본다. 중환자 한 명에 간호사 한 명이 붙잡혔으니 밤번 간호사들은 눈이 퀭했다.
날이 밝았다. 거친 호흡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듯 조용해지고 환자는 잠이 들었다. 여전히 병실 앞에는 보호자들이 동동거리고 서 있다. 간호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다. 바쁜 간호사들은 보호자까지 위로할 여력이 없다. 의료인에겐 단지 고령의 임종을 앞둔 환자지만 가족들에게는 하나뿐인 아버지다. 보내기 싫고 붙잡고 싶어서 더 예민하고 불안하다. 보호자를 안정시키는 일은 환자 간호에서 우선순위가 되기도 한다.
맏딸인 듯한 보호자의 손을 잡고 복도로 나왔다. 쉰은 넘어 보였다. “잘 지켜보고 최선을 다해서 간호할게요. 보호자가 불안하면 환자가 느낍니다. 조금 진정하시고 책임 보호자를 정해서 간호를 해주세요.” 등허리를 토닥였다. 환자가 조금씩 안정되어 가니 보호자도 진정되어 갔다.
다음날 환자는 부랴부랴 대형 병원으로 옮겨갔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아들의 사랑이었다. ‘휴우’숨을 돌렸다. 열 환자 같은 환자였다.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각종 검사만 하다가 다시 돌아올 것을 직감한다. 지금 상태는 아무리 대학병원이라도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이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오랜 임상경험에서 배웠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며칠 뒤 모니터의 알람에 의식을 매단 채 환자가 돌아왔다. 수백만 원의 검사비를 냈다고 했다. 남은 기력을 올곧이 검사만 하다가 돌아왔다. 아들의 소원은 풀고 온 셈이다.
다음날‘삐-’신호음과 동시에 생명의 샘은 멈췄다. 이별의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영원의 길로 떠났다. 남겨진 육신을 이승과의 이별식을 위한 장소로 보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붉은빛이 다시 손톱 밑에 나타났다. 붙잡을 틈도 없이 보냈던 예전의 주검들과 같은 선홍색이었다. 인생을 넉넉히 살다가 소풍처럼 다녀가려던 구순 노인은 왜 손톱 밑에 선홍색을 남기고 갔을까.
영원한 헤어짐 이기에 이별이라 하지 않고 죽음이라 한다. 다시 만날 수 없음에 사람들은 더욱 붙잡으려 애쓴다. 낡아서 고장난 시계를 태엽만 감는다고 언제까지나 움직일까. 무작정 태엽을 감으면 마지막 남은 톱니마저 형태를 잃는다. 온전히 기능이 다해 멈췄다 싶을 때는 그냥 지켜보아야 제 모습을 남긴다. 사람도 제 기능이 다하여 멈추려 할 때는 그냥 지켜보면 어떨까.
쉬운 이별은 어디 있을까마는 수명이 다하여 천수를 누리고 떠나는 길에는 더 이상 붙잡지 말고“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감사 인사를 나누는 이별을 했으면 좋겠다.
나무는 타고 나면 숯을 남긴다. 모든 불순물은 없어지고 나무의 영혼을 품은 것이 숯이다. 작은 구멍은 머금기도 하고 내뿜기도 한다. 검은색이지만 나뭇결은 살아있다. 결코 두렵거나 슬픔의 색, 죽음의 색은 아니다. 다시 불이 되기도 하고 독을 해독하고 나쁜 냄새도 품는다. 죽어서도 죽지 않은 것이다.
좋은 것은 나눠 주고, 나쁜 것은 가슴에 품고 가는 이별의 길이라면 더 이상 붉은 손톱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흔적 없이 단지, 가슴에 감사의 마음만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