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그리다.

by 마당넓은 집


창밖에 푸른 안개가 자욱하다. 물을 잔뜩 머금은 하늘에 어디선가 검푸른 물감 한 방울 날아와 앉았다. 가까이 벚나무가 안개 뒤에 숨어든다. 아득한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빗방울은 속삭이듯 쉼 없이 내리고, 고요한 눈으로 안개 낀 푸른 숲길을 생각한다.


마음 가는 대로 달린다. 목적지는 허공에 떠돌고, 자동차는 벌써 산성마을로 향하는 초입 숲에 닿았다. 여느 날 같으며 등산객으로 붐볐을 시간인데, 오늘은 고요하다. 그때 숲 속에서 하얀 자동차 한 대가 안개를 뚫고 갑자기 달려 나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나오는 영화 속 풍경 같다. 나는 마치 임무 교대를 하러 숲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전령사가 된 듯하다. 자동차는 안개에 갇힌 채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숲에서 비는 안개가 된다. 왕복 이차선 굽은 길은 내달리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 달릴라치면 꼬불길이다. 잦은 비로 잔풀이 웃자라 주변은 온통 초록이다. 8월에 숲의 나무들은 두려움 없는 소년처럼 당당하고 활기차다. 차는 도로의 원심력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따라 흐른다. 아스라이 연기처럼 솟아오르는 안개 속을 헤치며 굽은 길을 돌고 돈다. 빨려 가는 듯이, 숲이 나를 끌어당긴다. 어린 날의 기억이 그림처럼 아스라이 다시 살아난다.


어느 봄날이었다. 언니, 오빠가 읽던 문고판 『구운몽』을 읽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을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복사꽃이 천지사방에 피어올라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꽃향기가 발길을 이끌었다. 깊은 계곡을 따라가니 동굴이 보였다. 동굴 안은 별천지였다. 푸른 하늘에 빛이 가득했고, 꽃이 만발했다. 입이 벌어져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천상의 모습 같기도 하고, 아라비안나이트 속 세상이었다. 그 모습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잠이 깼다. 한참을 꿈에 취해서 멍하니 앉아 잠이 깨었다. 못다 본 꿈의 세계가 못내 아쉬워 다시 눈을 감고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뒤에 생긴 습관이다. 오늘같이 안개가 내리는 날에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다. 도화꽃 향기 흩날리던 그 비밀의 동굴이 안개가 걷히면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날 것만 같다. 딱 오늘 같은 날, 꼭꼭 숨어들었던 꿈이 다시 살아나기 좋은 날이다.

마을이 보인다. 룸미러에 마을버스가 바싹 붙어 따라온다. 괜스레 쫓기는 마음이 되어 속도를 높인다. 다행히 가까이 공영주차장이 있다. 자리는 넉넉하니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차를 세우고 나니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의자를 뒤로 하고 누웠다. 뮐러의「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노래」를 틀었다. 음악 소리가 잿빛을 닮았다. 슬픈 멜로디가 빗소리같이 가슴으로 떨어졌다. 금세 잠이 들었다.


잠시 뒤 눈을 떴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머리는 맑았다. 안개도 걷히고, 산성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근처 조용한 카페가 있었다. 제법 큰 2층 건물인데 1층에 손님이라곤 구석 자리 한 테이블 뿐이라 한적했다. 시원한 자몽 티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칠 듯 그칠 듯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산속 마을에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오르한 파묵의 그림일기「먼 산의 기억」이었다. 작가는 수년 동안 몰스킨 노트에 그림일기를 그렸고 그것을 엄선하여 책으로 엮었다. 무심히 붓질한 듯한 그림 속에 은근한 힘이 흐른다. 점과 선이 이어져 바다가 되고, 나무가 되고, 태양이 된다. 글은 소품처럼 끼어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상, 풍경, 고향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예사롭지 않다

.

그림을 바라보면서 작가의 삶을 다시 보게 되었다. 화가를 꿈꾸다 건축학도가 되었고, 그 후 작가의 길을 찾았다. 글을 쓰면서도 그림일기를 그리며 꿈을 이어갔다. 매일 주머니 속에 노트를 넣고 다니며 짬짬이 그림일기를 그렸다. 꿈을 그렸다.


숲속 카페에서 꿈을 읽는다. 바삐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길 잃은 꿈이 주변을 맴돈다. 파묵의 꿈이 찾아와 눈에 실리고 가슴에 담긴다. 잠들지 못한 꿈이 이제야 길을 찾는다.


펜 하나와 노트 한 권만이면 되었을 것을, 너무 오래 준비만 했다. 찻잔 바닥에 고인 자몽처럼 내 안에 잠든 붉은 꿈을 본다. 상상에 덧칠할 나이는 아니지만, 작은 글씨로 한자 한자, 더러는 연한 물감을 칠해가며 그려본다. 안개에 색을 입히고, 빗소리에 덧칠도 해 본다. 마음 가득 꿈이 꽃을 피웠다. 꿈속의 동굴처럼, 따뜻하게 꿈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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