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없었습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심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모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어른들이 그랬습니다. 제일 무서운 놈이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라고요. 천방지축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니까요.
저의 시골살이가 그랬습니다. 시골살이라 표현하는 것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체험에 가까운 놀이라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심을 것 중 하나가 메밀이었습니다. 어릴 적 메밀을 본 적은 있지만 지나가다 메밀꽃 핀 것을 몇 번 본 것과 메밀 묵을 먹은 것이 전부였지요.
무엇보다도 메밀에 대한 생각은 아무래도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이란 책에서 더 많이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소금꽃 같다는 메밀꽃과 달빛 아래 비치는 메밀밭, 나귀 소리, 이런 말들은 아직까지 기억 속에 남아있으니까요. 메밀을 내게 그런 소녀적 감성이 있는 곡물이었습니다.
두해 전 하동 장에서 메밀 한 줌을 사서 밭에 흩뿌리듯 뿌렸습니다. "메일은 어디서나 잘 자라. 아무렇게나 뿌려도 돼." 언니의 말이었습니다. 나중 알고 보니 언니도 해본 적은 없었고 듣기만 한 소리였더라고요. 그렇게 메밀을 뿌렸습니다. 싹은 재미나게 잘 났습니다. 그런데 비가 꽃도 피고 잘 자랐는데 비가 오고 나니 메밀이 모두 넘어졌어요. 바닥에 누운 메밀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주말 손으로
한 톨 한 톨 훑었습니다. 농사가 아니라 무슨 소중한 씨앗을 받듯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것이 두어 됫박은 넘게 되었습니다.
메밀 묵을 만들어 먹으려고 형제들에게 자랑을 하였습니다.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시골집의 맷돌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쓸 수가 없었고 방앗간에서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실험 삼아 분쇄기에 갈아도 껍질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포대에 담긴 메밀은 그렇게 창고에서 해를 넘겼습니다.
올해는 기필코 해결을 보아야지 했습니다. 지난 주말 읍내 방앗간을 여러 군데 들고 갔는데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모든 농산물이 제고장 특산물을 이용할 줄 알지 생소한 것을 이용할 기계는 없었습니다. 어제저녁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실험 정신이 또 고개를 스멀스멀 들고일어났지요.
메밀을 작은 그릇으로 하나 물에 담겠습니다. 밤새 물에 불려뒀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 껍질째 살짝 분쇄기를 돌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채에 껍질을 걸러냈습니다.
야호! 메밀가루가 분리되었습니다. 냄비에 넣고 뭉근히 끓였습니다. 물론 소금 한 꼬집 넣었지요. 퐁퐁
끓어오를 때 참기름 한 숟갈도 넣고요. 글쎄 메밀 묵이 완성되었어요. 이 년 만에 성과입니다.
유리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두어 시간 기다렸어요. 참 맛있었어요. 메밀 맛이 무척 진했어요.
단 한 가지 메밀 묵은 아니었고 메밀 죽이었어요. 다음 할 때도 좀 더 진득하게 끓이면 아마도 성공적인 메밀 묵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그래도 이 기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함께 하고자 이렇게 글로 남깁니다. 갈색의 예쁜 삼각형의 고깔처럼 생긴 예쁜 메밀, 메밀요리에 대한 해법을 발견하는 날입니다.
어려웠던 문제를 풀었을 때의 행복감. 오늘밤은 행복하게 잠들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