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중세의 시간
스투어헤드의 북쪽으로 (런던에서는 서쪽으로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호그와트의 마법이 남겨 있는 곳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곳은 '라콕(Lacock)'.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묘한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전봇대도, 텔레비전 안테나도, 아스팔트 도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 시대로 뚝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마을 전체를 사들여 보호하고 있는 이곳은, 21세기의 흔적을 철저히 지운 채 수백 년 전의 시간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중심에, 묵직한 돌로 지어진 수도원 '라콕 애비(Lacock Abbey)'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건물 내부로 들어선 순간, 차가운 공기와 함께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돌로 된 바닥, 정교하게 조각된 부채꼴 모양의 천장,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긴 복도. 함께 걷던 아이가 소리쳤습니다. "아빠! 여기 호그와트 학교예요!"
그렇습니다. 이곳은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가 투명 망토를 쓰고 몰래 걸었던 복도이자, 퀴렐 교수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수업이 열렸던 바로 그 교실이었습니다. 스네이프 교수가 "마법약 수업엔 지팡이 따윈 필요 없다"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던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차가운 돌기둥을 만져보았습니다. 영화 속 마법사들은 이 기둥 뒤에 숨어 주문을 외웠겠지요. 아이는 마법 지팡이 대신 나뭇가지를 들고 회랑을 뛰어다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현실의 무게를 잊었습니다. 병원에서의 긴장감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이곳 호그와트의 마법 앞에서는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콕 애비에는 해리포터보다 더 위대한 '진짜 마법'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진(Photography)'의 마법입니다. 비록 당시에 코로나 팬데믹 시기라, 단순한 입장만 허가되고, 실내는 문을 닫아서 아쉽긴했지만 글로만 남깁니다.
이 저택의 주인이었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1835년, 이곳의 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종이에 고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사진 네거티브, '오리엘 창문(The Oriel Window)'입니다.
탈보트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 여행의 순간들을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겨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순간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관람을 마치고 다시 라콕 마을의 흙길로 나왔습니다. 베이커리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고, 기념품 가게 창가에는 낡은 인형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편리함만을 좇아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옛 모습을 지키려는 내셔널 트러스트의 고집이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번아웃에 시달리던 한 의사는 500년 전의 회랑을 걸으며 쉴 수 있었고, 호기심 많은 아이는 마법사의 꿈을 꿀 수 있었으니까요.
라콕 애비는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뒤를 돌아봐도 괜찮다고, 오래된 것들 속에 미래를 살아갈 힘이 숨어 있다고 말입니다.
Dr. Myong's Travel Tip: 라콕 애비(Lacock Abbey)
위치: Lacock, Chippenham SN15 2LG
주차: 마을 입구 공용 주차장 이용 (내셔널 트러스트 회원 무료)
해리포터 스팟: The Cloisters: 호그와트 복도, The Warming Room: 거대한 솥(Cauldron)이 있는 곳 (퀴렐 교수의 교실), Sacristy: 스네이프 교수의 마법약 교실
Fox Talbot Museum: 입구 쪽에 있는 사진 박물관도 놓치지 마세요.
"호그와트의 마법 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다음 주는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영국의 남쪽 바다로 떠납니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풍경으로 손꼽히는 곳. 거센 바람과 파도가 깎아 만든 하얀 절벽의 파노라마,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