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을 바람에 날려보낸 곳, 세븐 시스터즈
중세의 수도원과 비밀스러운 정원들. 그동안의 영국 여행이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진짜 자연'과 마주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남쪽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런던을 벗어나 브라이튼(Brighton)을 지나 동쪽으로 조금 더 가자,
평화로운 초록색 들판이 뚝 끊기며 거짓말 같은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파란 바다 위로 수직으로 깎아지른 하얀 절벽.
마치 거인이 케이크를 칼로 툭 잘라놓은 듯한 단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풍경으로 꼽히는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였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는 '벌링 갭(Birling Gap)'이었습니다. 차 문을 여는 순간, 거센 바닷바람이 우리 가족을 덮쳤습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었지만, 그 바람마저 시원하게 느껴질 만큼 눈앞의 풍경은 경이로웠습니다.
절벽 위로는 끝없이 펼쳐진 초록색 잔디밭이, 아래로는 하얀색 절벽과 푸른 바다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봉우리가 마치 자매들이 손을 잡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세븐 시스터즈.
우리는 그 거대한 자매의 치맛자락 위를 걸었습니다. 펜스 하나 없는 절벽 끝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해변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절벽끝의 등대 앞에선,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아찔함,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뻥 뚫리는 해방감이 밀려왔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하얀 절벽은 사실 '백악(Chalk)'이라 불리는 무른 석회암 덩어리입니다. 파도와 바람에 의해 1년에 약 30~40cm씩 깎여나가고 있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도 언젠가는 바다로 사라질 운명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내셔널 트러스트의 관리 방식은 조금 독특합니다. 깎여나가는 절벽을 인공적으로 막으려 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후퇴(Managed Retreat)'를 허용합니다.
대신 그 뒤편의 땅을 미리 사들여 건물이 들어서지 못하게 막고, 자연이 물러나는 만큼 사람도 뒤로 물러설 공간을 확보합니다.
자연을 이기려 하지 않고, 순리대로 물러설 줄 아는 지혜. 그것이 이 하얀 절벽이 태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절벽 끝에서 등을 돌려, 내륙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븐 시스터즈의 뒤편에 숨겨진 '커크미어 강(Cuckmere River)'의 습지대입니다.
절벽 위가 마치 폭풍우 치는 격정적인 세상이었다면, 발아래 펼쳐진 습지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습니다. 바다를 향해 곧게 뻗지 않고 S자로 느리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 그리고 그 옆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 떼들.
우리는 바람을 피해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조금 전까지 귀를 때리던 바람 소리는 사라지고, 풀벌레 소리와 잔잔한 물소리만이 채워졌습니다.
직선으로만 달려야 했던 나의 병원 생활과 달리,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저 강물의 곡선이 마음에 깊은 평안을 주었습니다. 앞에는 웅장한 바다가, 뒤에는 목가적인 습지가 공존하는 곳. 세븐 시스터즈는 두 가지 얼굴로 지친 여행자를 안아주고 있었습니다.
절벽 위를 걷는 동안 내 머릿속을 짓누르던 복잡한 생각들은 거센 바람에 모두 날아갔습니다.
한국에서의 쌓여있는 일들, 병원에서의 압박감, 연구에 대한 스트레스...
수천만 년의 시간이 쌓인 이 거대한 하얀 벽 앞에서는 그 모든 고민이 찰나의 먼지처럼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은 바람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나는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어쩌면 지친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이렇게 나를 작게 만들어버리는 압도적인 자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가슴이 뻥 뚫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는 영국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위치: Birling Gap, Eastbourne BN20 0AB
주차: Birling Gap 주차장 (내셔널 트러스트 회원 무료)
뷰 포인트:
Birling Gap: 주차장에서 바로 절벽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접근성이 가장 좋습니다.
Seaford Head: 세븐 시스터즈의 7개 봉우리를 한눈에 담고 싶다면 차로 이동해 'Seaford Head' 맞은편에서 찍으세요.
주의: 안전 펜스가 없습니다. 사진 욕심에 절벽 끝으로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바람이 정말 셉니다)
PS. 프랑스 노르망디 에트르타(Étretat)를 가면, 마치 퍼즐처럼 세븐시스터즈와 비슷한 프랑스의 하얀 절벽을 볼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