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수채화 속 공간,스투어헤드

영화 <오만과 편견> 속 다아시가 되어 걷다

by 명준표 Jun Pyo M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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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열리고 그림이 펼쳐지다

런던에서 차로 2시간 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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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스투어헤드(Stourhead)'였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숲으로 들어서는 입구,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10월의 서늘 공기 속에 붉은색 안내판 하나가 우리 가족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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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거대한 호수를 중심으로 둥글게 이어진 산책로, 그리고 그 길목마다 자리 잡은 신전들. 이 지도는 지친 나에게 "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시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지도에 그려진 호수 오른쪽 길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 거대한 수채화 속을 걷기로 했습니다.


붉은 가을 옷을 입은 건물 (Spread Eagle Inn 주변)

호수로 가는 길,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붉은 벽돌 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벽돌색보다 더 붉은 것은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이었습니다.

10월의 영국은 이미 깊은 가을이었습니다. 세월의 때가 묻은 회색빛 벽 위로 붉은 단풍이 타고 올라가는 모습. 그것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서울의 빌딩 숲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차분하고 우아한 '시간의 색'이었습니다. 그저 입구에 서 있는 부속 건물일 뿐인데도,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습니다. 마치 "여기서부터는 시간이 느리게 흐릅니다"라고 알려주는 경계선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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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위의 고딕 첨탑, 브리스톨 하이 크로스

건물을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드넓은 잔디밭 위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독특한 탑이 나타났습니다.

뾰족한 첨탑과 섬세한 조각들이 마치 거대한 성당의 꼭대기를 떼어다 놓은 것 같았습니다. 이것은 '브리스톨 하이 크로스(Bristol High Cros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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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폭의 수채화 같은 전경

입구를 지나 숲의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거울처럼 잔잔한 호수, 그 위에 비친 고대 신전, 그리고 붉게 물든 나무들.

마치 누군가가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으로 정성스럽게 그려놓은 한 폭의 수채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기분이었습니다. 진료실의 모니터 불빛에 지쳐있던 내 눈이 비로소 시원한 숨을 쉬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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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아시가 고백하던 그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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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를 따라 걷는 길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시그니쳐인 판테온은 아름다움 그자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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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입니다. 걷다 보니 저 멀리 언덕 위에 익숙한 둥근 신전이 보입니다. 바로 '아폴로 신전(Temple of Apollo)'입니다.

이곳은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 <오만과 편견(2005)>에서 남자 주인공 다아시가 비를 쫄딱 맞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서툴게 첫사랑을 고백했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나의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소용없군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말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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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는 폭우가 쏟아지는 격정적인 장소였지만, 내가 마주한 스투어헤드는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신전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니, 왜 감독이 이 풍경을 '고백의 장소'로 택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꾸미지 않은 듯하지만 완벽하게 계산된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영국 정원의 매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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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캔버스로 삼은 은행가

걷다 보면 문득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거대한 정원을 만들었을까?"

스투어헤드는 18세기 은행가였던 헨리 호어 2세(Henry Hoare II)가 만든 걸작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이 정원을 만들 때 정원사가 아니라 '화가'의 마음으로 접근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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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영감을 받아, 영웅이 여행을 떠나고 명계(Underworld)로 내려갔다 돌아오는 여정을 정원 산책로에 구현했습니다. 호수 주변의 신전과 동굴들은 그 여정의 이정표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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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 삼아 이상적인 풍경을 '건설'해낸 18세기 영국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의 정수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셔널 트러스트는 이 거대한 예술품을 훼손하지 않고 1946년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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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처방받은 초록색 위로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데는 천천히 걸어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시계를 보며 1분, 1초를 쪼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곳 스투어헤드의 시간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느리게 흘렀습니다.

아이들은 떨어진 도토리를 줍느라 바빴고, 나는 폐 깊숙이 젖은 흙내음을 들이마셨습니다.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에게 휴식을 권했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휴식을 허락하지 않았던 지난날들이 호수 위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20200919_141838.jpg 이듬해 여름 다시 찾아간 스투어헤드는 여름의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초록색 정원은 내셔널 트러스트가 영국인들에게, 그리고 지친 이방인인 나에게 선물한 최고의 처방전이었습니다.


Dr. Myong's Travel Tip: 스투어헤드(Stourhead)

위치: Stourton, Warminster BA12 6QF

주차: 일반 £4~5 / 내셔널 트러스트 회원 무료 (멤버십 카드를 스캔하면 주차권이 나옵니다)

추천 코스: 입구 → 호수 오른쪽 길 → 판테온 → 아폴로 신전 → 팔라디안 다리 → 출구 (반시계 방향 추천)

포토존: 호수 입구에서 바라보는 판테온의 반영 샷이 베스트입니다.


다음 주는 해리포터가 마법을 배우던 오래된 사원, '라콕 애비'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