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안개 속의 거인을 만나다, 베드러선 스텝스

흐린 날에도 태양은 그곳에 있었다

by 명준표 Jun Pyo Myong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여행

리저드 포인트의 검푸른 바다의 북쪽으로 차를 달리면,


image.png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베드러선 스텝스(Carnewas at Bedruthan)'에 도착합니다.

image.png 해변을 찾아가면 보이는 안내문입니다. 제가 쓴글들에 나온 사진은 모두 직접 찍은 사진들이라, 구도가 완벽하진 않아요

하지만 도착할 즈음, 차창 밖 풍경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바다 쪽에서 밀려온 짙은 해무(海霧)가 언덕넘어 해변가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있었습니다. 차 문을 열자 습기를 머금은 하얀 공기가 훅 끼쳐 왔습니다.

처음엔 실망감이 밀려왔습니다. 여행 책자에서 봤던 파란 하늘과 거대한 바위의 조화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하얀 세상 속에 서자, 묘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너무 선명해서 눈이 아팠던 세상의 경계선들이, 안개 속에서는 부드럽게 지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정대로, 저 하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거인 베드러선이 걸어간 계단

몇 십분간의 트레킹을 하다보면,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입니다. 다행히 조금은 안개가 줄어듭니다.

20200709_102812.jpg
20200709_102819.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해변으로 내려가자 안개 사이로 거대한 바위 기둥들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0200709_104711.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이곳의 이름이 왜 '베드러선 스텝스(Bedruthan Steps)'인지 아시나요?

오래전 콘월 사람들은 이 해변에 '베드러선(Bedruthan)'이라는 거인이 살았다고 믿었습니다. 바다 위에 뚝, 뚝 떨어져 있는 저 거대한 바위 기둥(Sea Stacks)들은 바로 그 거인이 바다를 건너갈 때 밟았던 '징검다리(Steps)'였던 셈이죠.

맑은 날이었다면 그저 "풍화 작용이 만든 멋진 바위네" 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안개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거대한 바위의 실루엣을 보니, 정말로 저 너머에서 거인이 쿵, 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궂은 날씨가 전설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안개 속의 보물찾기

해안선옆 미끄러운 돌길을 조심조심 걸어 갔습니다. 돌들 사이에 습기를 좋아하는 달팽이들이 자신들이 자갈인냥 숨어 있었습니다. 달팽이를 피해서 걷는 걸음은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20200709_103937.jpg
20200709_104051.jpg
20200709_104230.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트레일

한참을 걸어 가다 보면, 언덕에서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들이 나타납니다. 아마도, Park head 근처였던 것 같습니다. 내셔널트러스트가 관리하는 곳들은 표식들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을 보여줍니다.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파크헤드 (Park head)

이 곳에서 우리는 해변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고, 언덕을 내려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20200709_105523.jpg
20200709_105338.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니, 파도가 오랜 시간 깎아 만든 기기묘묘한 바위의 질감, 발에 채이는 조약돌 소리, 그리고 해변 곳곳에 입을 벌리고 있는 비밀스러운 동굴들. 아이들에게 이 안개 낀 해변은 최고의 놀이터였습니다.

"아빠, 이 동굴 안에 거인이 숨어 있을지도 몰라요!"

20200709_113310.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20200709_114028.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우리는 보물찾기를 하듯 바위 틈과 동굴을 찾아다녔습니다. 화려한 전망은 없었지만, 축축한 바위를 손으로 짚고 동굴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촉각의 여행'. 가족끼리 서로의 목소리에만 의지하며 걷는 그 시간이 참 따뜻했습니다.

20200709_113927.jpg
해안가 동굴.png
20200709_114037.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구름 뒤에는 항상 태양이 있다

옷이 눅눅해질 만큼 안개 속을 탐험하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해안가를 조금 벗어나 내륙의 작은 언덕들을 지날 때였습니다. 거짓말 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20200709_194105.jpg
20200709_202452.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

백미러로 뒤를 보니 바다는 여전히 짙은 회색 안개 속에 잠겨 있는데, 우리 차가 달리는 언덕 위로는 황금빛 석양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20200709_202252.jpg
20200709_202329.jpg

차에서 내려 잠깐 초목의 길을 걸었는데, 분명 조금 전까지 우리는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에 있었는데, 불과 몇 분 거리의 언덕 위에는 눈부신 태양이 비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20200709_202600.jpg
20200709_202607.jpg 영국, 콘월(Cornwell), 베드러선 (Bedruthan)에서 숙소 가는길의 이름모를 언덕에서

초록색 언덕과 수없이 밀려드는 파도들이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습니다. 인생도, 그리고 내가 지나온 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지금 내 눈앞이 안개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구름 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안개 낀 바다도, 햇살 비친 언덕도 모두 여행의 일부였습니다.


Dr. Myong's Travel Tip: 베드러선 스텝스(Carnewas at Bedruthan)

위치: Bedruthan, St Eval, Wadebridge PL27 7UW

주차: National Trust Car Park (회원 무료)

카페: 주차장에 있는 'Carnewas Tea Room'은 뷰 맛집입니다.

안전 주의: 과거에는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Steps)이 개방되었으나, 최근에는 낙석 위험으로 인해 폐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문 전 내셔널 트러스트 홈페이지에서 접근 가능 여부를 꼭 확인하세요. (위에서 내려다보는 뷰만으로도 충분히 멋집니다.)


"자연이 깎아 만든 '거인의 계단'을 뒤로하고, 다음 주는 인간이 세운 '5천 년의 수수께끼'를 찾아 떠납니다.

누가, 왜, 이 무거운 돌들을 이곳으로 옮겨왔을까요?푸른 초원 위 양 떼와 거석들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풍경, 정교하게 쌓아올린 신의 거처 '스톤헨지와 솔즈베리 대성당'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영국 솔즈베리, 스톤헨지와 솔즈베리 대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