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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자 Mar 09. 2024

'삶'은 덕분에 사는 것

응급실 3

    

입원 6일째 되는 날. 

물 한 모금 못 먹은 지 6일째. 드디어 담낭을 제거하는 날이다. 상부 위장관 내시경과 역행성 담췌관 조영술이 끝나서 입원실로 오자마자 소화기 내과에서 외과로 넘겨졌다. 담낭 절제수술은 복강경으로 한다고 했다. 역행성 담췌관 조영술이 끝난 지난밤에 마취과 인턴이 동의서를 받으며 서류에 적힌 나이보다 열 살은 젊어 보인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면서 배꼽에 구멍을 뚫을 거라고 했다.     

 

입원 3일째 되는 날 내과 동의서 받으러 온 직원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복강경 수술을 할 예정인데 이 수술은 한 개나 두 개의 구멍을 뚫을 거라는 말을 했었다. 도대체 몇 개의 구멍을 뚫고 수술을 한다는 것인가? 마취과 인턴에게서 배꼽에 구멍을 뚫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물어볼 것을 그땐 생각을 못하고 그냥 오고 말았다. 몹시 궁금해졌다. 아침 회진 시간에 수술담당 외과 의사가 병실 커튼사이로 잠깐 얼굴만 쳐다보고 나갈 때 물어볼 것을 그랬다.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응급실로 입원해서 이기도 하고 간호사 간병동에 입원한 까닭이다. 아니다. 내가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생각을 못해 묻지 못한  탓이다.   

   

 오전 9시, 입원실 침대에 누운 채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  수술한 곳을 청소할 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초록색 수술가운을 입은 레지던트 몇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분 중 한 명에게 지금이 몇 시냐고 물었다. 그리고

 “제가 수술할 사람인데 몇 개의 구멍을 뚫고 하나요?”하고 물었다. 3개를 뚫을 거라고 했다. 뚫는 부위도 손으로 짚으며 가르쳐주었다. 배꼽과 오른쪽 갈비뼈 끝나는 부위의 간 바로 아래가 담낭이 있어 그 분분을 뚫을 것이고, 명치 아래 부분을 뚫을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

”이름을 말해주세요.” “000입니다.” 

“어디 수술을 하는 것이지요?”

“담낭 절제술” 

 입원실 침대에서 수술침대로 옮기라고 했다. 수술침대에 눕자 다시 “이름이 뭔가요?”

 “무슨 수술을 하나요?” 물었다. 

대답이 끝나자 이번엔 마스크처럼 된 것을 코와 입에 대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세요. 한 번 더, 더. 더...”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생각해 보니 회복실이었다. 살아있구나! 

11월 4일 새벽, 그러니까 며칠 전이더라?! 새벽 2시에 가슴 통증이 왔다.  40분쯤 데굴데굴 굴렀다. 119 부를까 하다 늘 다니던 성모병원 진료가 8시부터라 그때까지 기다렸었다. 그동안 가끔씩 통증이 왔다가 가라앉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119를 부르지 않았다. 

    

이번 통증은 하필이면 남편이 여행 가고 없었다. 아무래도 통증이 심상치 않아 혼자 버스를 타고 종합병원으로 갔다. 심장외과 선생님이 심근경색이나 협심증 일 것 같고, 수술해야 할 것 같다면서 입원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검사를 시작하면서 아무래도 애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셋 중에서 그래도 그 시간에 전화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막내에게 전화를 했다. 그곳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검사하고 있으면 곧장 출발해서 온다고 했었다.      


그리고 검사 중에 큰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막내가 연락을 했나 보다.  "막내가 시골 내려가는 동안 그곳 당진종합병원에서 검사를 해 결과지 가지고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오세요."라고 했었다. 그래서 막내가 오자마자 결과지를 받아가지고 다니던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가면서 응급실에 전화하니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막내는 고속도로에서 한 손은 운전을 하고, 한 손은 스마트폰으로 줄곧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연락을  했었다.   

  

 강남성모병원으로 내비게이션을 찍었다가, 다시 강북 삼성병원으로 가다가 그랬는데... 응급실마다 사람이 많아 오늘 밤이 지나도록 검사도 못할 것 같다고.

“엄마 대학병원 말고 그냥 중간병원으로 갈까요?” 하고는 강북삼성병원으로 내비게이션을 다시 입력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아들이 졸업한 고교 동창밴드에 

“가슴통증으로 어머니 모시고 서울로 가는 중. 응급실마다 사람이 많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올립니다.”     

이렇게 소식을 올렸다고 했다. 그 밴드 소식 보고 막내아들 선배가 즉시 연락이 와서 이곳 이대 목동병원으로 온 것이다. 내가 명은 긴가 보다. 그래서 이렇게 순식간에 담낭절제 수술을 한 것이고. 그러고 보니 본 적도 없는 아들 선배 교수님 덕을 본 것이다. 그리고 다섯 분이나 연락을 줬던 기억이 났다. 그분들께도 감사하고, 아들에게도 감사하고, 자식은 있어야 하는 거로구나!      


“괜찮으시죠?”

남편과 아이들이 왔다. 입안이 너무 말라 혀로 입안을 천천히 돌렸다. 낡은 수건을 푹푹 삶아 봄날 햇볕에 바짝 말린 마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때의 그  느낌 같은 혓바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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