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이라는 이름의 재설정

by 강재훈

우리는 지금껏 지각과 함께 살아왔다. 학창 시절 늦잠으로 인한 지각도 있고, 버스가 예정보다 늦게 와서 약속 장소에 늦은 경험도 있다.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 재수를 선택한 일 역시, 의도한 지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한 순간의 지각이 최종 결과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가는 길이 거의 같았고, 시간당 쏟을 수 있는 노력의 양도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출발이 늦으면 도착도 늦을 확률이 높았다. 학창 시절의 개근상이 그 중요성을 말해준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는 사뭇 다르다. AI 덕분에 단위 시간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양은 상상 이상으로 늘었다. 그야말로 생산성의 폭증이다. 이제는 시간이 부족해서 일을 못하는 경우보다, 전략과 방향이 잘못되어 성과가 떨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AI 시대에는 조금 늦게 출발했더라도 방향만 제대로 잡는다면,그 차이를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고, 때로는 역전도 가능하다. 경로를 수정하는 비용은 낮아졌고, 그만큼 다양한 선택지를 시험해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기 때문이다. 생산성의 폭증은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라는 신호로 보는 편이 낫다.

이제 지각이라는 이름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늦게 출발한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은, 어쩌면 방향을 다시 잡기 위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각은 실패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재설정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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