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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기절시키다.

수다

by 깨리

적극적이지 못한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사귀며 조금 달라졌다. 주 멤버는 4명이지만 제대로 모이면 10명 정도였다. 주로 한 친구 집으로 와르르 몰려가서 그 집 냉장고를 비우고 오기 일쑤였다.

다행히 친구 집은 잘 사는 편이라 우리에게 베푸는 걸 좋아했다. 맘 편히 놀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고3년 동안 친구들과 파란만장하게 보낸 시간 덕분에 내 속에 잠들어 있는 이야기꾼을 만나게 됐다. 말하게는 게 너무 좋았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아무 편견 없이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행복했다.

이야기는 1시간을 시작해서 5시간을 넘어서고 밤을 새우는 경지까지 이르게 됐다.


가끔 주말에 그 친구 엄마의 허락하에 집에 모여 1박 2일을 보내며 밤새워 놀았다. 토요일 점심때 가서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막춤도 추고, 패션쇼를 하며 음식도 만들어 먹고 밤이 되면 친구 방에 모여 이야기보따리를 각자 꺼냈다.

드라마, 영화, 배우, 가수 이야기로 시작해 무서운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나는 무서운 이야기를 잘한다.


어른들 말로는 잔병치레가 많은 나는 기가 약해서 가위에 잘 눌린다고 했다. 그래서 그 얘기만 풀어도 애들은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고 몸을 비벼대며 주위를 살피며 "그만!, 그만!"을 외쳤다.

그럼 또 다른 친구들은

"더 해줘, 더 무서운 거는 없어?"

"당연히 있지, 말할까? 말까?"

몇 명은 이불속으로 숨고 나머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나를 응시하며 눈을 반짝인다.

나는 그 순간을 만끽하며 이야기에 취해 좀 더 리얼하고 섬세하게 수다를 푼다. 반응은 여러 가지다. 무서워 울거나 시디플레이어를 듣거나 괴담을 즐기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자거나 한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친구 방에서 나는 수다로 헤엄을 치기 시작하면 밤을 새워도 멈출 수 없다.

"제발, 부탁인데 우리 잠 좀 자면 안 될까?"

"안돼! 나는 지금 시작이야? 조금만 더 안될까?"

"새벽 3시야, 이러다 해 뜨겠다. 우리 제발 자자!"

"알았어, 대답 안 해도 되니까 듣기만 해? 듣기만"


나의 말들은 수면제가 되어 친구들을 한 명씩 기절시킨다. 모두가 잠들 때까지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창문 밖이 환해지고 있다.

"뭐야? 다 자는 거야?" 새벽 5시 나만 남았다.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친구들아 미안해! 그리고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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