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20대 후반
연애, 직장 모두 실패하고 한동안 동굴에 나를 가두고 연기를 하며 살다 불현듯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생각한 적이 있다.
딱히 꿈도 없었고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아무것도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살다가 모는 걸 놓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아침이 되니까 눈을 떴고 집에 있기 싫어 밖으로 나갔고 나가서는 그냥 걸었다. 지치면 집에 갔고 저녁 먹으라 하면 밥을 먹고 잠들었다.
늘 같은 일들이 같은 시간대에 행해졌다.
그냥 로봇처럼 정해진 입력값에 따라 이루어졌다.
아무도 나에게 뭐가 되라고 바란 적 없고 나도 무엇이 되고자 생각한 적도 없던 시절이었다.
무기력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나를 조금씩 버리고 껍데기만 남았었다. 마음이 텅 비어 정신적 허기가 나를 삼켰다.
음식 섭취를 거부하며 영양실조로 쓰러져 병원에 가며 내가 바닥을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진도는 나갈 수 없었다. 모두로부터 거부받는다고 생각했다.
광녀가 되어 정처 없이 걸었다.
이유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지칠 때까지 그냥 걸었다. 힘들면 앉아서 쉬고 배가 고파 속이 쓰리면 두유를 하나 사서 허기를 달랬다. 그리곤 그곳이 반환점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있던 돈이 거의 떨어지자 나는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집에 손을 내밀 처지가 아니라서 급하게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날도 그냥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이었다. 거기를 몇 바퀴를 걸었을까? 뒷골목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큰 건물 사이로 아주 작고 허름하며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은 유리 창문이 달린 나무문이 나에게 말을 건다. "들어 올래?"
나는 뭐에 홀린 듯 들어가 구석 자리 창가에 앉았다.
바깥세상과 전혀 다른 만화에 나올법한 귀엽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내 눈을 현혹했다.
마치 빨간 머리 앤이 다이애나를 보고 느낀 감정과 비슷할 거다. 나는 그때까지 아기자기하고 어여쁜 것에 대한 감흥이 없었지만, 그 카페는 내 관점을 바꿔주었다.
그 이후로 매일 카페에 가서 혼자 핫초코를 시키고 한 시간을 힐링하고 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음악이 나오면 듣거나 속으로 따라 부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가 방문하는 시간은 한적해서 더 좋았다.
정신적으로 쉬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힐링을 받기 위해 알바를 구해 열심히 일했다.
아르바이트하러 가기 전 루틴으로 카페에 가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처음으로 느긋함을 배우고 즐겼다. 쫓기는 삶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세밀하게 느낄 수 있는 하루가 소중함을 알게 되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