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뒤돌아보았을 때 곁에서 ‘사라진 사람들’과의 장면은 가슴 아프게 남아있다. 이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도록 기억하고 싶다.
통합 학교에 가서 성, 직업, 사회성 등을 주제로 장애가 있는 중・고등학생들을 만났다. 학교사회복지사가 없던 시기, 학교로 초빙된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주어진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복지관의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수학급반 선생님들은 수업뿐 아니라, 학생의 학교생활이나 가정생활을 살펴보고 복지관에서 연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요청하셨다. 그래서 교육적인 지원보다는 학생들이 학교 생활에서 겪는 차별, 이로 인한 저항 행동(부적응행동이라 불리기 일쑤다), 교사나 부모조차 무기력해지는 학교의 분위기에 대해 고민했다.
그때마다 학생의 가정에 방문하기도 하고, 주말엔 지역사회의 청소년 활동을 연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삶은 주로 부모가 결정하고, 가정의 종교에 따라 정해지곤 했다. 연습하면 충분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학생이 용돈도 주지 않고 걸어 다니라는 부모의 지시에 따르느라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험이 없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도 부모의 종교에 따라 주말마다 일정한 복식을 하고 종교생활을 해야 해서 또래들과 추억을 쌓을 기회가 부족했다. 반면에 자녀에게 적극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부모의 자녀는 누구보다 먼저 주말 활동을 신청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서로의 곁에서, 동네에서 다양한 삶의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끌어당기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그 사이 만났던 수많은 학생들 중에서 ‘곁에서 사라진’ 그 학생은 처음 만났을 때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했고, 단발머리를 푹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했다. 그래서 유독 작아 보였으나 길게 늘어뜨린 단발머리 사이로 눈을 마주치며 웃어줄 땐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 학생의 부모님은 적극적이지도, 인권침해적이지도 않아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학생이 부모님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경찰서에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경찰, 아동보호기관과 함께 학생의 가정을 찾아가 어머니, 학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은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꼿꼿한 몸짓과 언어로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벽증에 가까운 어머니의 생활 태도가 학생과 부딪힐 때마다 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도 학생에게 한 행동을 인정했고 자녀와 같이 살겠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뉴스에서 보던 아동학대 사건들처럼 끔찍하고 놀라운 폭력만 보고, 직접 아동학대로 신고된 사건을 접해보니 달랐다. 사소하게 여겼던 일들로 가정이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이후 학생은 행정기관에서 연결해 찾아둔 시설의 빈자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학생은 작은 책가방에 자신의 물건들을 담았고, 어머니는 작은 박스에 옷가지를 담아주셨다. 어떤 실랑이도 없었고 긴장감도 없었다. 복지관에서 온 나의 역할은 정해진 계획대로 학생을 정해진 시설의 그 자리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같은 구에 위치한 시설이라 버스로 한 번에 갈 수 있는 근거리였다. 이전에도 사회복지사로 시설에 드나든 경험은 있었지만 사람이 시설에 가는 길을 동행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나이 어린 학생과 가벼운 짐을 들고 낯선 시설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입소인이 된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입구의 커다란 대문을 지나니 대학교에 있을 법한 커다란 운동장이 보였다. 땡볕 아래 재밌는 놀이기구들이나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대형건물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시설의 직원을 만났다. 커다란 칠판에는 시설에 있는 아이들의 수가 적혀 있었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수도 적혀 있었다. 그냥 ‘시설’이라고 뭉뚱그려 알고 있었고 부모나 가정이 없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안내하던 직원은 부모도 가정도 있지만 가정에서 분리되거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시설에 오게 된 아이들이 더 많다고 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런데도 시설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나의 가족이 시설에 가는 것이 싫었고, 할머니가 시설에서 돌아가신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나의 삶 속에서 지난했던 시설의 모습과 달리, 한 발치 떨어진 지인을 직접 시설에 보내는 과정은 너무나 빨랐다. 부모도 아니고, 행정기관도 아닌 민간의 사회복지사에게 주어진 역할은 없었다. 학생과 그 길에서 새지 않고 짐을 들고 잘 찾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앉을 새도 없이 금세 자리를 배정받아 옷이 담긴 작은 박스를 들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직원을 따라갔다. 직원은 시설이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이 있었을 만큼 오래되었고, 지금은 수영장까지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는 동안 비슷한 옷과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운동장을 지나가면서 동네에 이렇게 큰 시설이 오랫동안 있었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 복지관에서는 ‘장애인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자’며 외쳐왔는데, 그제야 제대로 된 지역사회의 현실을 맞닥뜨렸다.
직원이 안내해 준 건물로 들어가니 열린 방문들 사이로 2층 침대들이 보였다. 낯선 풍경과 분위기에 당황해 정작 학생의 반응을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어느 지점부터 입소인이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어 학생에게 들고 있던 박스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말을 나누거나 감정을 보일 새도 없이 담담하게 헤어졌다. 이후 학생을 만나러 시설에 찾아가곤 했지만 드넓은 운동장에 앉아 나눈 대화들은 심심했다. 학생의 꼿꼿하던 모습은 사라졌고 다시 눈을 마주치거나 미소를 발견하긴 어려웠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시설에서 연락이 왔다. 학생이 건물에서 떨어져 응급실에 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정말 몰랐는가?’
시설 안에서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다른 입소인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이 경험한 세상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아 무서웠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전해 들었지만, 병원으로 향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결국 학생은 말 문을 열지 않았고, 나도 어떤 말이나 위로도 할 수 없어 그저 옆에 있었던 것 같다. 학생은 몸이 나아져 퇴원했지만, 처음 있던 시설에서 곧 다른 장애인 시설로 가게 됐다.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 사회복지사의 역할은 필요 없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학생이 미련 없이 온몸으로 떨쳐 버리고자 했던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시설이라는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해 나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지역사회에서 시설로 들어가는 길에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 길을 멈추기 위해 학생에게 지역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물어볼 용기도, 어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사회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희망도 없었다.
사회복지사는 지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사람을 내 손으로 시설에 보낸 과정은 몸에 각인된다. 죄책감, 무력감이 가득한 장면 속에 사람들을 묶어두는 것 같다. 이후에도 특별한 인권침해 상황이 아니더라도, 정말 평범하게 자기 집에서 살면서 복지관을 오가던 사람들도 부모가 아프거나, 좋은 시설이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볼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그래도 한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무엇을 할 수 있나?’ 그저 말없이, 한없이 그 사람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부끄러운 기억을 꺼내어 적는 것은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고백하고, 더 오래도록 깊이 기억하겠다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 용기를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것은 이제는 그들이 사라져 간 길에 빨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고, 그 길을 다시 역행해 탈시설한 사람들과 나눈 애정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