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스럽게 함께 버티기

by 이정

‘그때 우리 참 재밌었지’라며 오랜만에 옛 동료의 메시지를 받았다. 오랜만에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다.

‘언제 참 재미있고, 행복했었나?’ 하나같이 당시에는 고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동네에서 장애당사자들과 활개 치던 순간들이다. 장애청년과 동네 경로당 어르신들의 생신잔치를 해드린다고 무거운 과일을 들고 허둥댔던 기억, 혼자 살고 계신 당사자와 나눠먹겠다고 텃밭상자 들고 옥탑방에 후들거리며 올라가던 기억, 동네 어린이집 아이들과 ‘나눔'을 주제로 사생대회 하던 기억, 캠핑하겠다고 리어카에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 가지고 '집 나서면 개고생'이라는 이름을 짓고 신나 하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애쓰는 동안 장애당사자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동등한 이웃’이 될 수 있었고, 도와주는 데만 익숙했던 자원활동가들은 장애당사자의 역할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때는 ‘우리 지역에서는 장애인도 이웃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는 순수한 바람이 가득했다. 그래서 복지관 건물 안에서 일주일을 꽉 채우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또 다른 시설 같이 느껴졌다. 장애청년들이 9시부터 6시까지 짜인 활동에 맡겨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동네에서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이웃과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장애당사자와 함께 의논하면서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시간과 동네에서 함께 살아본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서 참여하는 장애당사자뿐 아니라, 다른 팀의 동료, 마당발인 자원활동가,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함께 다니는 부모, 마을활동가들과 만나고 협력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그렇게 장애당사자가 복지관 프로그램실이 아니라 동네 카페에서 취미활동을 하기도 하고, 동네 텃밭에서 텃밭활동가들과 함께 작물을 가꾸거나 산책길의 쓰레기를 함께 줍는 활동이 시작됐다.

복지관에서 일하면서는 장애청년이 다닐 수 있는 대학강의수업을 지역사회 곳곳에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해외엔 이미 지역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들을 수 있는 평생교육 활동이 있다고 했다. 지역사회 대학과 협력해서 장애청년들이 대학교나 평생학습관에 가서 일부 강의를 청강하기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관련된 경험을 할 수 있는 학습지를 동네 곳곳에 만들고 싶었다. 장애청년들이 공동체로 일하면서 얼마큼 일하는지에 상관없이 고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사업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직장이 생겨서 장애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급여를 받고, ‘장애당사자와 동료가 되어서 함께 일하는 현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변화되지 않았던 것은, 장애당사자가 이용료를 내는 ‘이용인’이고, 나는 ‘선생님’이자 ‘사회복지사’라는 위치였다. 장애당사자는 지역사회에서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이용료를 내고 경험해야 했다. 동시에 사회복지사였던 나는 ‘사람’이나 ‘권리’를 앞에 두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기초생활수급 인원을 체크하며 수입지출을 맞추기 위한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결국엔 더 많은 예산을 지원을 받기 위해서 행정이나 외부의 펀드가 원하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그런 순간이면 장애당사자가 주체자가 되어 지역사회에서 함께 활동하길 원했던 꿈은 이상이 되고, 눈앞의 ‘예산’이나 ‘실적’ 같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능력 있게 앞서가는 사회복지사여야 했다. 그래서인지 당사자와 함께 고생하며 만든 추억들은 동료로서 일하고 싶었던 꿈을 이뤘던 순간들이라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활동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선배 활동가에게 요청했던 한 가지는 ‘장애당사자와 함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그 힘과 경험이 있어야 활동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시설에서 머물다 나온 장애당사자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몰랐다.

동료에게 했던 요청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정말 잘 지켜지고 있다. 기자회견, 결의대회, 증언대회, 토론회, 행진, 연대회의 등 여러 투쟁의 순간마다 나의 두 번째 꿈을 이룬다. 투쟁의 장소는 어디서든 고생스럽기도 하고 두려워서 애써야 하는 일 투성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우위에 있는 전문가나 서비스 제공자가 없고, 돈 내고 권리를 사야 하는 이용인도 없다. 모두가 서로의 이야기를 존중하지만, 무엇보다 당사자가 시설에 있었던 경험, 탈시설하며 겪은 깨달음, 다른 이들도 탈시설하길 바라는 마음이 모든 과정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부족한 예산이라도 함께 활동할 수 있는데 쪼개 쓰는 기쁨이 크다. 더 이상 실적을 늘리기 위해 고민하지 않고 1이 100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대신 우리의 속도가 늦어져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에 시달려 혼자 앞서 달리지 않도록, 서로의 걸음이 함께 가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앞서 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면서도 누군가를 두고 가는 것을 가장 큰 흠으로 여기며 산다. 그래서 밥이 아닌 죽이 되더라도 ‘함께 만들었으니 됐다’, ‘나눠먹을 수 있으니 좋다’며 과정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여유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복잡한 이슈가 빠르게 흘러가는 인권현장 속에서 언제든 서로의 손을 놓치게 되는 순간들이 올지 모른다. 그럴 때면 누군가라도 ‘같이 가야지’라며 버티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이 있다. ‘같이 가기 힘들다’라고 말하기 조차 힘든 사람이 생긴다면, 그 또한 수용하고 그 사람을 떠올릴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애인권현장에서는 예산이나 자격을 따지기 전에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모두의 것'으로 받아 안고 활동한다. 어떤 철학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면 그 이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장애인권현장에서 장애가 있는 동료들과 함께 버티고 있을 때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고맙고 든든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덕분에 나는 생애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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