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관에서 직원으로서 일하는 동안 나의 삶은 점점 더 풍성해졌다. 사회인으로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렀고, 힘이 되는 동료들을 만났다. 취업한 지 3년쯤에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와 사는 엄마가 됐다. 그러는 사이 국가가 보장하는 육아휴직을 하고 공동육아사회적협동조합에서 이웃들과 만나며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당시에는 육아휴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기관도 많았지만, 첫 직장은 비교적 ‘좋은 기관’이었다. 운영법인의 친인척이 산하기관의 운영자로 일하면서 갑질을 하거나, 직원이 그만둘 때까지 괴롭히거나, 쏟아지는 업무량을 견딜 수 있는 사람들만 남는 곳들이 허다했다. 그러니 복지관에서 일하던 동료들은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어리석고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7년 만에 팀장이 되었고, 복지관에서 일했던 10여 년의 시간 동안 특별한 걸림돌이 없었다. 법인 운영진의 친인척은 우리 기관엔 없었고, 좋은 선배들과 동료들이 있었으며, 쏟아지는 업무량은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팀장이 되고 나서는 더 거침없이 일했다.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좋은 기관', '좋은 사회복지사', '좋은 활동'이 된다고 생각해서 신나게 일했다. 자비로 해외연수를 다녀오기도 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큰 후원을 받아와서 복지관 활동을 더 풍성하게 하려고 했다. '좋은 일'을 신나게 잘하고 있으니 당연히 좋은 결과가 올 거라고 믿었다.
'좋은 결과'는 기관 내부적으로 인력이나 예산이 많아지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기관’이었던 우리 복지관은 우리 동네가 장애당사자가 평등한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미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청년들도 자신의 작품으로 급여를 받을 수 있거나, 배우고자 하는 당사자는 누구든 원하는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집중했다. 그렇게 당사자가 주체자로 활동하는 지역사회로 변화되려면, 팀원이 더 늘어나서 개별적인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외부에서 예산을 후원받거나 공공의 시범사업을 하느라 행정을 하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고 장애당사자가 사는 지역사회를 돌아다니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외부의 후원 없이 장애당사자와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나 급여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복지관의 예산은 고정적인 지출항목에서 변동되기 어려워, 장애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을 우선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장애당사자에게 필요한 교육이나 활동예산을 더 마련하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외부지원을 찾아야 했다. 행정업무는 지역사회를 돌아다니는 시간을 고려해서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팀원들이 낮에 하지 못한 행정적인 업무를 해야 하는 초과 업무 시간들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좋은 기관’인 우리 복지관의 미션을 믿고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 기관의 미션대로 당사자가 주체가 되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예산이 더 많이 편성되어, 당사자의 활동이 안정적인 예산을 확보하거나 인력을 충원할 수 있는 시점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때까지 바쁘게 많이 일하는 기간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바쁘고 힘든 나머지 팀원들이 웃음기를 잃어가도 이 시간이 지나면 '좋은 결과'가 우리를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럴 수 없다는 건 팀장이 된 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맞닥뜨렸다. 예산이나 인력은 '옳고 그름'이나 '미션'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거대한 기관의 운영을 위해 편성된 예산은 유동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장애당사자가 이용할 수 있는 지역사회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부딪힌 접근성의 문제, 장애인을 포함하지 않는 지역사회의 운영 방침의 문제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분명 비인권적인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역신문에 기사를 쓰는 것 하나조차 복지관 직원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팀은 지역사회에서 장애당사자가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활동을 만들었다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처럼 나를 포함한 팀의 과반수가 자리를 떠났다. 너무나 굳건한 복지관의 예산 구조를 확인했다고 생각하니, 그 벽을 깰 수 있다는 희망조차 갖지 않았다. 그래서 더 누구에게도 퇴사하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고, 동료들은 신나게 인정받으며 일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는 이유를 찾지 못해 의아해했다. 아껴주시던 분들은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시설의 원장도 할 수 있다며 미래를 보라고 타일렀다.
걸림돌 없이 살아오다 무모하고 순진했던 '열심'과 ‘긍정’이 팀원들을 소진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나의 삶도 무기력해졌다. 듣지도 보지 못했던 걸림돌에 크게 걸려 넘어져버렸다. 그곳,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스스로가 더 무서워질 것 같았다. 모순적인 상황들을 잘 참고 살다 보면 나의 삶은 더 풍요로워지겠으나 그건 원하던 내 모습이 아닌 거라 마음이 아프게 될 게 뻔했다. 소중한 것들이 가득했던 곳에서 더는 순수하게 진정을 다하기 어렵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더 소진시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사실 활동가로 살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걸림돌에 부딪히며 산다. 정부가 내세우는 예산의 벽은 복지관에서 만났던 권력자나 예산의 벽보다 훨씬 높다. 그 앞에서 지금도 무모하고 순수하게 열심히 살고는 있다. 하지만 이 걸림돌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직면하며 싸울 수 있다. '여기에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세운 벽이 있소'라고 세상에 외치며 사는 것은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없을지라도 통쾌하다. 고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것, 당연하고 좋은 것들을 기준으로 쓰고 제안할 수 있어 마음이 휘둘리지 않는다. 더 넓고 높은 사회의 벽을 허물지 못하는 날들이 숱하지만, 무력하지 않으니 작은 한 걸음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나로 살 수 있어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