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요즘 할머니가 왜 자꾸 생각나는지 알 길이 없다. “정하야”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답답한 마음에 상담실도 찾아가 봤다. 혹시 정신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했다. 한 상담가는 할머니를 잘 떠나보내지 못해서라고 했다. 어쩌면 떠나보낼 생각이 없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가는 출근길에 버스를 타고 싶다고 외치며 투쟁하고 있는 동지(함께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의 영상을 보았다. 서울 한복판에 서있게 된 출근길 버스는 활동가를 금세라도 칠 듯 무섭게 위협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고 한숨이 났다. 그리고 이내 슬퍼졌다. 할머니가 생각나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장애인도 함께 버스타자'고 외치는 영상 메시지는 한동안 출근길에 그칠 수 없는 눈물샘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나의 할머니는 버스를 타기 위해 읽지 못하는 한글과 숫자를 곱게 적은 수첩을 들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일명 ‘병신’이 왜 버스를 타냐며 욕하는 사람들의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할머니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 되어 버렸었다.
영상을 통해 본 장애인의 현실이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처음엔 슬퍼서 눈물이 났지만, 나중엔 출근길 버스를 가로막고 서서 ‘장애인도 같이 버스 타고 가자’라며 외치는 활동가에게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언젠가 할머니에게 허리가 왜 90도로 굽어있는지 물었던 적이 있다. 할머니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났는데 그때 척추를 부딪쳐 다친 후 펼 수 없었다고 했다. 보상은커녕 버스를 탈 때마다 ‘병신’이란 말을 듣고 조용히 내리는 일이 많았다.
그런 할머니를 위해 10대 손녀가 해드릴 수 있는 건 할머니가 한순간이라도 욕을 덜 먹고, 버스를 빨리 탈 수 있도록, 버스 번호를 최대한 정갈하게, 크게 적어드리는 거였다. 할머니는 어떤 버스를 타야 제대로 이동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고, 알게 되어도 계단이 높아 느리게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수첩을 들고 정류장에서 사람들에게 이 버스가 오면 좀 알려달라, 태워달라 때때마다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그 종이가 닳고 닳으면 또다시 적어드리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우리에겐 버스 번호가 적힌 수첩만이 간절했다.
할머니와 정말 버스를 정말 타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좋은 곳 놀러 가고 말로만 듣던 할머니 고향 집도 가보고 싶었다. 당시에는 이루기 어려운 너무 큰 희망이었다. 할머니의 신체적 시간은 너무 빨리 흘렀지만, 사회의 변화는 지지리도 느렸다. 결국 할머니와 나는 함께 버스를 타지 못했고, 할머니와 처음 탄 버스는 운구차가 되었다. 그 차 안에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음속으로 할머니에게 화장터 가는 길이 나와 가는 여행인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장애인도 버스 타게 해 주십시오’라는 종이를 들고 장애인은 탈 수 없는 계단형 차별 버스를 가로막고 서 있는 활동가는 나에게 왜 예전에는 이런 상상을 하지 못했는가 하는 부끄럽고 억울한 마음이 들게 했다. 할머니와 같은 수많은 사람을 내려둔 채 빠르게 내달리는 세상을 활동가들이 멈추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기도 했다. 세상에 우리 마음을 대변하는 사람, 우리 편이 있었구나. 마음이 복받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전국의 수많은 동지들과 시민들이 함께 "장애인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자"라고 적은 종이를 들고 지하철에 선다. 이제는 꼬깃한 수첩대신 모두가 마음 편히 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타고 먼 고향길 함께 가자고 외치는 시대가 되었다. 그 옛날 버스를 탈 때마다 사람 아닌 존재로 취급받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모두가 탈 수 있는 버스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변했지만 여전히 이들을 욕되게 바라보는 시선들인 지하철, 버스 어디에나 있다. 할머니에겐 너무 늦어버렸고 변하지 않은 시선들은 계속 되지만 그럼에도 "나도 타겠다"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세상이 당연해졌으니, 앞으로는 버스타지 못해 세상 억울한 눈물도 덜하지 싶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