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어쩌다 혼자 남겨졌을까
알람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드는 바깥으로 나갔다.
거실 바닥에는 라면박스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빠뜨린 물건이 없도록 꼼꼼하게 짐을 챙기는 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창고방에서 커다란 보냉박스를 가져온 그가 냉장고를 열고 식료품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쌀도 가져갈까?”
그가 나를 흘낏 돌아보며 말했다.
“아... 놔두고 가.”
“당신, 밥 안 해 먹잖아.”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는 지퍼백에 나눠 담은 쌀 봉지는 놔두고 김치통과 스파게티 소스를 챙겨 넣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간 그가 양모 이불을 커다란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나왔다.
“이불도 가져가려고?”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그가 난처한 듯 말했다.
“내가 쓰던 거잖아. 이게 편해서.”
좁은 현관에 여행용 캐리어와 보냉박스, 이불 보퉁이가 발 디딜 틈 없이 쌓였다.
그는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거구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무척 생소했다.
짐을 다 챙긴 그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한 손으로 쓸어 닦으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잠이 덜 깬 채로 거실 의자에 앉아서 그가 샤워를 하는 물소리를 들었다.
창 밖의 어둠은 쉽사리 알아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어 닦고 반팔 카라티와 긴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는 한결 개운해 보였다.
현관 앞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상자 몇 개를 한꺼번에 들고 그가 현관문을 나섰다. 나도 양손에 짐 보퉁이를 들고 따라나섰다. 그는 나를 만류하려다 말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우리는 이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에 내려서 비상문을 열고 주차장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여름 새벽 공기는 신선했다. 그는 차를 비상문 앞으로 몰고와서 라면상자를 하나씩 실었다.
해뜨기 전 진청 빛 어둠 속에서 출고한 지 몇 달 안된 새 차가 눈부시게 하얀 자태를 빛냈다.
그는 내가 잠든 사이에 자동차 뒷좌석을 접어서 평평하게 만든 후 책상과 컴퓨터 의자를 미리 실어놓았다. 타고난 꼼꼼한 성격대로 라면상자들을 빈 공간에 차곡차곡 채워 넣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는 보냉박스와 이불 보퉁이를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들어가.”
안전벨트를 맨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씻은 청결한 얼굴에 그늘진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해 보였다.
“가는 거 보고.”
그가 시선을 내비게이션에 고정하고 목적지를 입력하고 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잘 지내라.”
한 손을 들어 보이는 나를 남겨둔 채, 그가 모는 하얀색 자동차가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배웅을 마치고 이층까지 계단을 올라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가 쓰던 방은 알맹이를 빼먹은 소라껍데기처럼 텅 비어 있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낯선 감정이 밀려들었다.
어쩌다가 홀로 남았을까.
그에게 떠나 달라고 말했던 두 달 전,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그와 헤어지기를 원했다.
그에게 말을 붙이기가 두려웠던 게 언제부터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TV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를 조용히 지나쳐서 내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사 년간 남자 친구였고 이십 년간 남편이었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달랐던 지가 적어도 오륙 년은 넘었다. 마주 앉아 가벼운 수다를 떠는 것은 어림없었다. 의견을 물어볼 수가 없으니 눈치만 보았다.
혼자 넘겨짚었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을 때면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마다 절망감이 엄습했고, 그가 미웠다.
그와 나는 성격이나 취향이 너무 달랐다.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면 그는 드라마나 영화에 한참 몰입하다가 손수 요리를 해서 반주 한 잔을 곁들여 느긋하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반면에 나는 바깥바람을 쐬면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쳐다보며 걷다가 방금 나타난 가게에서 평소와 다른 메뉴로 요기를 하며 알록달록한 모양이나 특이한 향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싶어 했다.
그가 집안의 일상에서 평화로움을 느끼는 반면에 나는 바깥에서 마주치는 우연에서 기쁨을 찾았다.
사실 그가 나와 산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건 결혼한 직후부터였다.
그전에 우리는 꽤 오랜 교제기간을 가졌으며 데이트를 하거나 여행을 떠나서 함께 걸은 적도 많았으므로 그가 걸어 다니는 것을 싫어한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일상과 여행을 엄격히 구분했고 목적 없이 걷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실내에 머무는 것을 선호했다. 나는 정반대로 바깥바람을 쐬면서 걸을 때가 가장 편안했다.
한때는 그의 소년 같은 과묵함과 썰렁한 농담을 무척 좋아했다.
그 또한 웬만한 일은 혼자 알아서 처리하고 가끔씩 어리광을 떠는 나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취향이 전혀 다른 데다가 서로의 생각에 대부분 공감하지 못했으므로 여가시간을 함께 보낼 수가 없었다. 그의 의견을 물으면 대부분 '네 마음대로 해.'라고 말했는데 그 의미는 ‘나는 상관하고 싶지 않으니 너 혼자 알아서 해.’라는 뜻이었다.
이제 와서 그가 떠난 자리가 아무리 허전해도 할 수 없었다. 마음이 떠난 몸은 억지로 붙들고 있어 봤자 소용없었다. 먼저 나가 달라고 말한 것은 내 쪽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방마다 창을 활짝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맨 발바닥에 닿는 바닥이 깨끗해지자 창고방 상자에서 비취색 면 커튼과 망사 속커튼을 꺼내왔다. 그는 깔끔한 우드 블라인드가 마음에 든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이케아에서 골랐던 커튼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몇 달 동안 처박혀 있었다.
의자를 밟고 창틀 위로 올라가서 몇 번의 실패를 거친 후에 커튼을 봉에 끼워서 거실 창틀에 고정했다.
비취색 커튼을 드리우고 하얀 망사 속커튼을 가볍게 묶어놓자 실내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창가에 앉아서 커튼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떠난 어색한 첫날이 소리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