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여섯 장의 카드

D-5.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by 유랑

오전 11시. 카드 배송원의 전화에 잠에서 깼다.

이사온지 8개월째건만 아직도 스크린도어 여는 법을 몰라서 부스스한 머리에 캡 모자를 눌러쓰고 1층으로 나갔다. 신분증을 건네고 전자서명을 한 후에 카드와 사용설명서가 든 두툼한 봉투를 건네받았다.



아주 평범한 일상. 하지만 예전과 달리 나는 혼자이다.

앞으로는 내 카드로 차에 기름을 넣고 식료품을 사고 세금을 내야 한다.

그가 떠나기 한 달 전, 앞으로는 내 카드를 사용하는 편이 낫겠냐고 물어보았다.

그 전에는 그의 카드로 실적을 채우면 여러 가지 혜택을 주므로 차에 기름을 넣거나 마트에 가고 식당에 갈 때 몰아서 썼었다. 그와 나는 성인이고 각자의 은행 잔고가 있었으므로 매달 말일에 내가 사용한 금액을 그의 계좌로 입금했다.

제주도로 내려오면서 그가 하던 일을 못하게 되었으니 월세와 가구를 사는데 드는 비용은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월세는 일 년 치를 선불로 입금했지만 살림살이 비용은 그의 카드로 그었으므로 정확히 얼마를 썼는지는 불분명했다. 수입은 줄었는데 새로운 생활에 드는 자잘한 지출은 늘어만 갔다.

그가 싫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듣기 싫어했다. 그의 카드 명세서에서 내 개인적인 지출금액은 따로 계좌에 입금하겠다고 말했다.

경제공동체로 번 돈을 함께 저축하고 나누어 쓰지 못하고 네 돈과 내 돈을 갈라서 쓰기 시작한 한 것은 혼인 생활 파탄의 시작이었다. 합리성의 이름으로 그와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우리는 각자 편한 대로 생활했다. 그는 집에서 요리를 해 먹고 티브이를 보거나 자기 방에서 컴퓨터로 자기 관심사를 검색했다.

나는 트래킹 모임에 가입해서 혼자 집 밖으로 나갔다. 등산복과 등산화를 사고 모임 사람들과 밥을 먹거나 카페에 가서 돈을 썼다. 내 생각에는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외식을 하는데 필요한 돈은 충분했다. 제주도에는 갈 곳이 많고도 많은데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는 그가 미웠다. 싸우지 않으려면 내가 집에서 나가 했다.

익명의 사람들과 서로 닉네임을 부르면서 해변 길을 따라 걷고 진초록 숲 속을 지칠 때까지 걸었다. 제주도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하늘이 파랗다가도 구름이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면서 비가 내리곤 했다. 곶자왈 숲 속에서 나무들이 내뿜는 생명력은 무시무시해서 거대한 뿌리를 드러내며 반쯤 쓰러진 채로도 무성하게 잎을 드리우고 꽃을 피워 올렸다. 진록색 나뭇잎 사이로 새어드는 한 줌의 햇빛은 보석처럼 빛났다. 걷고 또 걷고,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걷고만 싶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오면 현관 앞에 택배 박스가 쌓여 있었다. 그의 눈치를 보면서 새 옷과 등산화와 양산과 자외선 차단 크림 택배 박스를 내 방에 갖고 들어가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는 택배 쓰레기가 쌓인다며 불평을 했다. 생활비 정산은 십원 단위까지 날로 정교해져 갔다. 그러는 사이 이십 년을 같이 살았던 정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헤어지기 얼마 전에 그는 깨알같이 챙겼던 카드 혜택을 포기하고 앞으로는 내 카드를 따로 사용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기름값이 올라서 차에 기름이 매달 삼사십 만원씩 들어갔으므로 주유할인카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카드를 알아봤더니 새로 발급받아서 실적을 채우면 캐시백을 해주는 카드가 여러 종류 있었다. 주유 할인카드를 신청했더니 카드사에서 전화가 왔다. 간단한 통화 후에 집으로 카드가 배송되었다. 신용점수가 높으니 문제 될 게 없었나 보았다. 카드 한 장 만들고 십오 만원만 사용하면 십오 만원을 거저 준다니 다른 카드에도 눈길이 갔다. 주유할인카드와 쇼핑 캐시백 적립 카드, 카페와 영화관 할인카드 등등, 두 달 동안 여섯 장의 새 카드가 집으로 도착했다.

첫 달의 카드 실적은 아주 쉽게 채웠다. 아침에 갈 곳을 만드느라 골프 연습장에 알아보고, 석 달 치 요금을 한꺼번에 내면 할인을 해준다고 해서 카드 두 장의 실적을 한꺼번에 해결했다. 골프웨어가 한두 벌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인터넷 아웃렛 쇼핑몰을 둘러보다가 80% 할인하는 재고를 몇 가지 득템 하면서 세 번째 카드도 손쉽게 해결했다. 지인에게 점심을 사고 차에 기름을 넣고 나니 나머지 카드 실적도 해결되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있는 밤에 카드 혜택을 따져가며 물건을 사들이다 보면, 그가 떠난 빈자리와 소름 끼치는 적막함도 외면할 수 있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외로움을 견디는 걸까.

3개월 간 골프 레슨을 받으며 연습하는 비용을 카드 캐시백으로 충당할 수 있다니 이익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알아보니 카드사에서 주는 캐시백은 일부 사용처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간편 결제 포인트인 데다가 두 달 후에나 들어온다고 했다. 카드대금 결제는 당장 다음 달이었다.


앞으로는 내 카드로 오피스텔 관리비와 세금과 자동차 보험료를 내야 한다.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름값도 아끼고 마트나 편의점에 갈 때도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카드를 골라 써야 하겠지.

아무 생각 없이 할인 혜택 적용이 안 되는 엉뚱한 카드를 쓸 때마다 그는 인상을 썼었고, 그때마다 나는 겁먹은 채 눈치를 봤는데..그러다가 이혼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카드 할인 혜택을 챙기려는 게 우스웠다.

이제 내 카드를 긋고 다음 달 카드 대금 결제도 알아서 해결해야 하리라.



앞으로는 좀 아껴 써야 할까. 굳이 그럴 필요 있을까. 신세 진 지인에게 밥을 사고,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킬 운동을 하느라 꼭 필요한 데 가진 돈을 썼을 뿐인데.

돈을 막 쓴다고 눈치를 주던 그가 떠났는데 이제 와서 뭘 아껴야 하나. 죽을 때 짊어지고 가지도 못한 돈을 써 보지도 못한 채로 은행 잔고에 남겨놓기는 싫었다. 다음 달 카드 결제대금을 치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이혼한 후 첫 달인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