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골프공이 티 위로 솟아올랐다. 양손으로 그립을 단단히 움켜쥐고 오른쪽으로 들어 올렸다.
등은 45도 각도, 무릎을 살짝 굽히고 어깨는 펼 것. 왼팔을 똑바로 쭉 뻗고 휘둘렀다.
7번 아이언 클럽 끝부분이 어설프게 건드리는 바람에 공은 맥없이 날아갔다.
- 어깨 펴세요, 너무 힘주진 말고.
- 팔꿈치가 구부러져 있어.
레슨 프로의 음성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면서 몸은 더욱 뻣뻣해졌다.
하늘은 푸르고 솜이불처럼 커다랗고 하얀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었다. 습기를 머금은 더운 바람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사정없이 불어댔다.
- 서른 개 치고 휴식.
벤치를 향해 돌아서는데 옆 타석의 남자가 경쾌하게 스윙을 했다. 하얀 공이 날렵한 새처럼 날아갔다. 맥없이 의자에 주저앉아서 티 너머로 디지털 숫자판이 깜빡이며 바뀌는 것을 쳐다보았다.
이혼 15일 차.
아침에 일어나서 골프 연습장까지 걸어 간 후에 운동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카페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루틴을 만들었다.
밤에 자려면 아침에 일어나서 움직여야 했다. 잠에서 깼을 때 캄캄한 암흑 속에서 온 세상천지에 혼자뿐인 나를 자각하며 공포에 질리는 순간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녹색 그물 너머로 한라산을 바라보며 초보자 레슨 15분 포함 총 90분 동안 엉성하게 골프채를 휘두르며 연습을 했다.
집에서 연습장까지는 도보로 30분이 걸린다.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대형 카페까지는 다시 걸어서 30여분이다.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다가 사방의 통유리로 시야가 확 트인 카페 2층에서 노트북을 펼치면 시간이 잘 흘러갔다.
실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 지나간 과거는 이미 관념이고 허상이다.
창 너머로 짙푸른 서귀포의 난대림 숲은 꿈속처럼 낯선데, 시스템 에어컨이 뿜어내는 차가운 공기로 인해 늦여름의 실내는 비현실적으로 서늘했다.
땀을 식히면서 얼음이 사각거리는 카페라떼를 한 모금씩 마시노라면 회한으로 들끓던 머릿속이 텅 비어 갔다.
모든 것은 변하고 인연은 왔다가 사라지는 것. 그와 나도 한때는 젊었고 서로 사랑했었다. 그와 나는 언젠가부터 마주 보지 않았다. 드문드문 던지는 말들은 온통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는 나를 떠났다. 이게 다 꿈이라면. 과거와 연결된 것은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같이 골프를 배우자고 했었는데 막상 오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돈도 아깝고 연습하기도 귀찮다고 했다. 우리가 예전처럼 즐겁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림자처럼 집안에만 머무르던 그가 어쩌다 꺼내는 말은 돈 얘기였다.
수도권 아파트를 비워놓고 제주도에서 생활하느라 써버린 돈은 어떻게 보면 많기도 했고 적기도 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그는 그 돈이 아까웠고 나는 아깝지 않았다. 월세와 관리비와 카드 대금과 세금이 얼마나 나왔는지 생각하는 게 끔찍했다. 어차피 내야 할 돈이라면 내버리면 그만이었다.
돈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며 나는 그와의 대화를 피했다. 그가 옆에 있어도 외로웠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나눌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같이 있어봤자 혼자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할 뿐이었다.
주 5일 레슨을 포함하여 매일 90분간 골프 연습장을 이용하는데 드는 비용은 한 달에 삼십오 만원.
그는 입버릇처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했지만 그의 싸늘한 눈초리 앞에서 번번이 나는 새로 산 물건들을 숨겨야만 했다. 내가 번 돈을 내가 쓰는 건데도 쓰고 싶은 데 쓸 수가 없었다.
골프를 배우게 된 계기는 트래킹 모임에서 만난 지인 덕분이었다. 나와 동갑인 그녀는 크고 스타일이 좋았으며 독신이었다. 예전에 그녀는 제주도에는 멋진 골프장이 많고 이용요금도 저렴한 편이므로 골프는 꼭 배워보라고 권했다.
그가 떠난 다음날, 그녀가 레슨을 받는 실내 연습장에 레슨 상담 겸 구경을 갔다. 긴 팔을 쭉 뻗어서 풀스윙을 하며 드라이브샷을 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시원스럽고 멋졌다. 골프공이 딱 소리를 내며 벽으로 날아갈 때마다 검정색 반팔티 아래로 불룩하게 배가 나온 남자가 ‘조금 더 가까이’, ‘그렇지 잘한다’ 라며 동작을 지도했다.
레슨이 끝나자 그녀가 한숨을 돌리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포즈가 멋지다고 칭찬하자 프로골퍼가 덩달아서 칭찬과 농담 섞인 핀잔을 몇 마디 던졌다. 그가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후에 나에게 골프를 배운 적 있는지 물었다. 골프는 한 번도 배워본 적 없고 타고나길 운동신경이라곤 전혀 없는 몸치라고 말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골프는 테니스나 야구와는 달리 바닥에 멈춘 공을 날리는 운동이므로 정확한 스윙이 중요하지 운동신경은 없어도 된다며, 반년에서 일 년만 배우면 평생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 하면서.
그 사이에 그녀는 아이언 클럽으로 바꿔 들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만 가보겠다고 하자 조금만 기다렸다가 함께 저녁을 먹자며 붙들었다.
골프 연습장을 나와서 지인과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독신으로 쉰한 살이 된 그녀는 부드럽지만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다. 같은 나이에 남편과 헤어져서 혼자가 되는 나를 섣불리 동정하지 않았다. 그 배려와 적당한 무관심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그날 들렀던 연습장은 매일 운동하러 가기에는 먼 데다가 나는 실내보다 트인 곳을 원했으므로 집에서 가까운 다른 연습장을 알아보기로 했다.
긴 생머리를 멋지게 늘어뜨린 그녀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한때는 결혼했다가 이혼하게 되었지만, 애초에 결혼한 적 없는 그녀를 부러워하지는 않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