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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Oct 27. 2024

8. 엇갈림

그 일이 온전히 내 탓이었을까.

오랫동안 나는 생각했다. 번번이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수영의 자취방에 대한 기억은 눈앞에 그려 볼 수도 있을 정도로 또렷하다. 탁한 푸른색의 벽. 물병으로 쓰던 빈 보드카 유리병. 커다란 우드 스피커와 철제침대. 수영의 체취가 옅게 밴 뻣뻣한 면 침구의 감촉.

나는 그저 잔소리를 늘어놓는 룸메이트보다 말이 없고 앞머리가 눈을 가린 수영이 만만했기 때문에 그곳에 죽치고 지냈던 걸까.

아무리 그랬어도 왜 나는 그토록 자주 비닐봉지에 사과를 사 가서 수영의 텅 빈 냉장고를 내 것인 양 채워놓았을까. 주인 눈치도 안 보고 와그작 소리를 내면서 베어 먹었을까. 밤늦게 수영이 끓여준 라면을 먹다가 소주도 있냐고 물었을까. 대체 왜 취한 채로 수영의 침대로 기어들어 갔을까.

내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던 이유는 단순히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록 언니의 침대에서 잠들 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와 아빠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처럼 무기력해졌다. 온 가족이 여행을 가서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던 일, 호텔로 갔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고, 고아가 된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술 취한 채로 수영의 침대에 누워있다가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올려놓았던 것은, 그저 동맥을 통해서 온몸에 피가 순환하도록 펌프질을 하는 소리를 더 자세하게 듣고 싶어서였다. 셔츠 단추를 풀고 맨살에 귀를 댔던 이유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참혹한 시신을 떠올리기 싫어서였다.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하면 집요하게 머릿속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상 속 장면을 어떻게든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나는 한 번도 수영에게 그래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너의 자취방에 가도 되냐고, 침대에 올라가도 되냐고, 심장 소리를 들어도 되냐고 허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린애처럼 그를 졸라서 청량리역으로 끌고 가 완행열차표 두 장을 샀듯 수영의 의사도 묻지 않고 내 마음대로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니 그가 내 바지를 벗긴 일을 갖고 마냥 그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은 아닐까.

록 언니를 따라 나온, 언니가 예비 시어머니와 브런치 타임을 갖는 자리에서 나는 수영의 마음을, 가능한 한 멀리 떠나고 싶어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한다. 자기 연민에  빠진 채로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제멋대로의 여자애 때문에 수영의 그늘이 더욱 깊어졌다는 것도.

                                                                                          *          

수영의 어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록 언니의 손을 잡았다. 짤막하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가 명품브랜드의 단아한 미니멀리즘을 뽐내며 뭉툭한 광택을 발산했다.

- 세상에, 내가 며느리를 다 볼 줄이야.

그녀는 감격에 겨운 듯 록 언니의 길쭉한 손바닥에 봉투를 꼭 쥐어주었다.

레스토랑을 나오다가 수영의 어머니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아래위로 쓱 훑어보았다. 언니를 볼 때와 달리 차갑고 예리한 눈초리였다. 자그마한 체구에 암팡진 인상의 그녀는 나에게도 용돈이라며 하얀 봉투를 주었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사양하자 그녀는 내 호주머니에 봉투를 억지로 쑤셔 넣었다. 예비 시어머니가 사돈처녀를 꼭 데려오라 했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나갔던 자리였다. 오길 잘했지? 언니가 씩 웃었다. 백만 원짜리 그 수표를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록 언니는 예비 시어머니가 건네준 예물 비용을 예술계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알차게 썼던 것 같다. 유명한 셰프가  직접 요리하는 코스요리를 대접하면서 난독증 때문에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수영의 성장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늘어놓았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았어도 타고난 재능과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스토리에 미술 평론가와 기자들은 열광했다. 그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 살을 붙였다. 사람의 마음도 물거품과 같다는 둥 물거품처럼 부질없이 스러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는 등.

해석이야 어떻든 수영의 그림은 직관적으로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파도가 만든 물거품의 형상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런 그림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미대 교수들의 발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영은 엄청난 가격에 작품을 판매하는 화가가 되었다.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시절, 고개도 삐뚜름하고 걸음걸이도 휘청거리고 연필 잡는 것마저 어색하고 이상하던 촌스러운 남자애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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