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랑 Oct 27. 2024

9. 신혼부부

검은색 그랜드 체로키에 반듯하게 앉아서 차를 몰던 수영은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피트니스 클럽으로 직행했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하지 않으면 힘들어한다고 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딱 붙은 반팔 티 안에서 그의 가슴과 어깨 근육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두 명의 조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독채 리조트 안팎을 뛰어다녔다.

록 언니는 아이들이 집 안과 마당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도록 발코니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흰 면티에 통이 넓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직접 내린 커피를 소파 쪽으로 가져오는 언니의 모습에서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쌍둥이를 돌보느라 지친 기색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록 언니는 언제나 그러했다. 힘들이지 않고 명문대에 진학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회사에서 경력을 쌓다가 한국 지사로 발령을 받은 후에는 휴가 때마다 배낭을 메고 자유롭게 여행하다가 수영을 만나서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언니의 손에 걸리면 그 어떤 것도 어려울 게 없었다. 난독증이든 무위도식에 가깝게 낙서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려대는 보잘것없는 경력이든 여섯 살 아래의 숫기 없는 백수이든.

마당에 있는 온수풀에서 물을 튀기면서 놀던 아이들이 언니가 부르자 쪼르르 달려왔다.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깐 방으로 들어가더니 얌전하게 누웠다.

“낮잠 시간이거든.”

눈 깜짝할 사이에 잠든 아이들을 보면서 신기해하자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도 누워서 쉴래?”

열려있는 안방 문 너머로 커다란 침상이 보였다.

                                                                                          *     

서늘한 침실 안에서 언니 옆에 나란히 누웠다.

초여름의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은 눈이 부셨지만 기다란 처마 아래로 그늘진 방 안은 어둑하고도 고요했다. 금세 단잠에 푹 빠질 것 같았다. 옆에 누운 언니의 숨소리는 규칙적이었다. 눕자마자 잠든 것 같았다.

예전에도 이렇듯 록 언니와 한 침대에 누워있었던 적이 자주 있었다. 큰집에 갓 들어왔던 무렵에.

부모님의 사고 소식을 듣자 큰아버지는 당연한 듯 나를 큰집으로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서도 학교 잘 다닐 수 있다고, 지금까지도 그래왔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 상복을 입고 영정사진 앞에 서 있으면서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작은 여행사 지점을 운영하던 부모님은 새로운 여행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떠났던 인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출장을 겸한 여행에 따라가 봐야 힘들기만 하고 재미도 없다는 걸 알았던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나는 혼자 집에 남아서 학교에 다녔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인도로 날아가서 어렵사리 비행기로 시신을 실어온 큰아버지는 입관은 당신 혼자 하겠다며 흐느꼈다. 그때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내 손을 꼭 붙들면서 아무 걱정하지 말고 큰집으로 가자고 하던 큰아버지께 제발 나를 이대로 놔두고 가시라고 애걸했다. 큰아버지가 고개를 젓자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제야 나는 울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때문이 아니라 큰집에 가기 싫어서. 장례식 사흘 내내 눈길 한 번 한 주던 차가운 큰어머니가 무서워서.     

큰아버지 댁은 차고와 정원이 딸린 널따란 이층 집이었다. 서울에서 그 정도 집에 살려면 얼마나 부자여야 하는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이라도 알았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하게 화장을 하고 다니던 큰어머니가 이 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중학생 여자아이가 사용할만한 새 가구로 잘 꾸며진 방이었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즐겨 입던 엄마와 아빠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큰아버지 부부를 어려워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지 주름이 칼날같이 선 먹색 양복을 입은 큰아버지는 마치 교장선생님 같았다. 큰어머니는 TV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처럼 차가웠다. 낯선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록 언니가 슬며시 들어오더니 내 손을 끌면서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침대에 앉은 언니의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드러난 맨 무릎이 선명하게 보였다. 언니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내 등을 토닥이다가 자기 방에서 같이 지내자며 내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록 언니는 대학 생활을 즐기느라 바빠서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온 날에도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우는 나를 어김없이 안아주었다. 아침에 잠이 깨도 손끝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을 때면 겨드랑이나 발바닥을 간질이면서 흐드러지게 웃었다.

언니가 유학을 가버린 후, 대학에 가면 나도 언니처럼 활기찬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막연히 기대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텅 빈 운동장 가장자리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수영이 언제부터 나와 스탠드에 나란히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있는 새들처럼 부질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학생식당의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면 식판에 음식을 받아와서 말없이 밥을 먹었다. 처음에는 한 테이블 정도 떨어져서 앉다가 나중에는 한 테이블에 대각선 방향으로 앉게 되었다.

하루는 수영이 내게 돈을 줄 테니 교양과목 리포트를  대신 써달라고 말했다.

- 어머니한테 부탁하면 써 주시긴 하는데.

발끝만 보면서 말하는 수영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뚝뚝 묻어 있었다.

수영은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미술대학의 필수과목이었던 석고상을 보면서 하는 데생이나 크로키는 어림없었다. 그가 잘 그리는 건 눈을 감고 있으면 보인다는 이상한 무늬들뿐이었다.

록 언니는 수영의 난독증이 미국의 특수교육센터에서 받은 시지각 트레이닝으로 거의 완벽하게 교정되었다고 했다. 자세나 걸음걸이가 반듯해지고 운전까지 하는 건 그 덕분이었다.

‘최근에 좋은 치료법이 나와서 말이야.’

언니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          

귓가에서 들리는 록 언니의 얕은 숨소리가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평화로웠다.

언니는 내가 한때 수영과 가까웠던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가족이나 연인도, 친구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단순한 동창은 아니었다는 걸.

그 옛날 수영과 나는 서로를 제외한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불편해했지만 지금 그에게는 나를 제외한 세상이 익숙한데 나만 불편해 보였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나오지 말 걸 그랬나.

실은 며칠이나 고민했었다.

언니가 보고 싶기도 했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가도 못 나간다는 핑계를 시도 때도 없이 떠올렸다. 다시는 그들을 보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가만히 누워있는데 따듯하고 말랑한 팔다리가 내 몸을 꾹꾹 누르면서 기어올랐다. 뜻밖의 기습에 당황하자 잠이 깬 언니가 쿡쿡 웃었다. 가슴께와 다리를 타고 넘어온 작은 침입자들은 언니와 나 사이로 천연덕스럽게 파고 들어와서 보드라운 몸뚱이를 잇달아 뉘었다.

내 코에 닿은 어린아이의 정수리에서 햇볕에 잘 마른풀처럼  달큼한  향내가 풍겼다. 한 아이가 동그랗게 만 등으로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나는 사내아이 조카를 팔로 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는 내 다리 사이에 통통한 몸을 끼워 넣었다. 언니와 나와 두 아이는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자 언니도 따라서 웃었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멍한 가운데 언뜻 생각이 스쳤다. 수영은 매일같이 이걸 누리고 있구나. 그래서 그의 부드러운 물거품이 그토록 아름다운 거구나. 가슴이 무겁고 먹먹해지면서 눈꺼풀 안이 암막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컴컴해졌다.

언니는 가만히 침대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운동을 마치고 온 수영이 리조트에 막 도착하였으므로.

식탁 앞에 선 언니가 비닐봉지  매듭을 풀고 포장 음식 용기를 꺼내서 상을 차리는 동안 수영은 싱크대 앞에 서서 능숙한 솜씨로 과일과 채소를 씻었다. 둘은 수시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수영이 그토록 환하게 웃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딱새우회와 과일 샐러드, 모듬초밥, 아이들을 위한 도시락으로 그럴듯한 저녁식사가 즉석에서 완성되었다.

쌍둥이들은 높다란 유아의자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고 언니가 덜어준 식판에 달려들었다. 언니가 블루투스 스피커에 재즈 음악을 연결하는 동안 수영이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따서 언니의 글라스에 따랐다. 천장과 벽의 조명등 불빛이 사방으로 환한 빛을 뿌렸다. 젊고 아름다운 부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이좋게 건배를 했다.

나는 서둘러 스시 몇 조각을 입에 쑤셔 넣고 탄산음료를 급히 삼켰다. 재채기가 나올 뻔한 걸 온몸에 힘을 꽉 주면서 숨을 멈추고는 가까스로 참았다. 

리조트의 작은 방에서 자고 가라고 언니가 붙들었지만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건배를 하던 수영의 다른 한 손이 언니의 허리께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제주도를 돌아다니면서 같이 놀자는 걸 의뢰받은 일을 해야 한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칼 같은 내 태도에 언니는 조금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분위기를 살필 여유도 없을 정도로 나는 허둥대고 있었다. 언니는 이름난 레스토랑 이름을 대면서 저녁이라도 꼭 같이 먹자고 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서 낡은 차에 올랐다. 엔진이 털털거리면서 시동이 걸렸다. 혼자 배웅을 나와서 현관 앞에 서 있던 언니는 무언가 할 말이 남은 것처럼 개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차창을 반쯤 내려서 언니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