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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Oct 27. 2024

11. 수영의 방문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바람 소리를 듣다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았다. 세찬 바닷바람이 차를 흔드는 바람에 선잠에서 깨어났다.

여름 해가 높이 떠 있었다. 몸을 절반쯤 일으키고 차창 너머로 공터를 훑었으나 강아지들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차 안에서 웅크리고 잤더니 피부가 근질거리고 몸이 개운하지 못했다. 일단 집에 가서 씻고 짐을 챙겨서 나오기로 했다.

침실로 들어가서 내 물건을 골라내서 거실 바닥에 가져갈 옷과 책을 가져와서 높다랗게 쌓기 시작했다.

여행용 캐리어를 활짝 펼쳐놓고 속옷과 세면도구부터 챙겼다. 마트 장바구니를 가져와서 대충 쑤셔 넣는데 느닷없이 현관 벨이 울렸다.

찾아올 사람이라곤 없는데 누굴까. 요즘에는 누구나 방문하기 전에 미리 연락해서 양해를 구한다. 택배나 배달도 문자메시지로 연락할 뿐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인터폰 카메라를 보니 검은 캡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서 있었다. 낯익은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한, 아무튼 아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

초인종에 응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벨을 누른 후에 휴대전화를 손에 드는 모습이 액정화면에 보였다.

내 휴대폰에서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밖이야? 놔두고 갈게.

답문자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대뜸 도어록이  울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이곳은 수영과 언니의 집이었다. 비밀번호는 그들이 설정한 그대로였다.

거실 한가운데 짐을 쌓아놓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와 신문지로 싼 꾸러미를 들고 있는 수영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았다.

놀라움으로 시작해서 차츰 낭패한 기색이 그의 얼굴에 빠르게 퍼져갔다.

“이사 가냐?”

그가 철제 옷걸이째로 바닥에 쌓여있는 옷가지를 쳐다보았다.

“어디 가려고.”

수영이 어색하게 질문했다.

“그걸 왜 묻는데.”

날 선 대답이 튀어나와 버렸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내 귀로 듣기에도 당황스러울 만큼 공격적인 어조였다.

“아…”

수영은 눈에 띄게 불편해했다. 발끝만 보는 그는 그제야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그냥. 이거 주려고.”

수영이 신문지에 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가 뭔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절대로 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너라도 행복해졌으니 다행이라고. 록 언니와 결혼하고 유명한 화가가 되고 아이들도 생겨서 축하한다고. 나도 기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말하기 싫었다.

느닷없이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엉뚱한 말이었다.

“나 돈 많아.”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모님의 사망 보험금이 고스란히 계좌에 쌓여있었다. 스무 살 생일에 큰아버지가 나를 직접 불러서 통장을 보여주고 신신당부하셨다. 네 부모의 목숨값이니 신중하게 쓰라고. 

그 말씀이 아니고라도 건드리기 싫었다. 그 돈을 쓴다는 건 두 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거였다. 계좌를 열어서 돈을 빼내는 순간 엄마와 아빠가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도 영영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여전히 두 분이 떠나셨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수영에게 등을 돌린 채로 나는 트렁크 앞에 주저앉았다.

“가.”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기계적으로 옷가지를 쑤셔 넣었다.

생각을 안 하려고 애를 썼지만, 머릿속에서 악다구니가 울렸다.

왜 여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상견례 장소에서 마주친 이후로 왜 나를 줄곧 모른 척했는데. 록 언니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어쩌다가 좋아졌는지 말해주면 내가 뭘 어떻게 할까 봐서?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내가 어딜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도어록이 다시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 수영이 서 있던 현관은 텅 비어있었다. 턱이 아픈 바람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수영이 내게 무엇을 주든 그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주제넘게도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차올라서 부옇게 시야가 흐려졌다. 공터에 웅크리고 있던 강아지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들개가 되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까. 누군가의 신고로 잡혀가서 안락사나 당할까. 그래도 끝까지 둘이 함께 있을까.

그 시절 우리는 의지할 데 하나 없이 나란히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있었다. 학교 다니는 것도 힘들었고 졸업을 해봤자 갈 데라곤 없었다. 잘난 의사 부모에게서 외아들로 태어나 글자도 제대로 못 읽는 수영이나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나나 세상 살기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거친 풀이 우거진 공터를 맴도는 유기견처럼 우리는 잠깐 어울려 다녔던 것뿐이었다.      

한참을 주저앉아있다가 다시 짐을 쌌다.

목과 어깨가 뻐근해져서 허리를 쭉 펴고 거실 창 너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납작한 네모 앞에 작고 동그란 바위섬이 붙어 있는 범섬은 크고 무거운 등딱지를 감당하느라 힘든 거북이처럼 보였다.     

여행용 트렁크와 마트 장바구니에 싼 짐을 들고나가서  자동차 뒷좌석과 트렁크에 실었다. 수영이 준 그림도 들고 나왔다. 이십 호짜리 그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캔버스가 아니라 마치 깃털 같았다. 조수석 노트북 가방 위에 수영의 그림을 포개어 올려놓았다.

아름다운 물 위의 집에 작별을 고한 후에 나는 여름 햇볕이 쏟아지는 아스팔트 도로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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