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소파에 앉아서 한숨 돌리던 윤은 내가 차에서 배낭끈을 한쪽 어깨에 걸고 신문지로 싼 꾸러미를 손에 들고 오는 걸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그림인가요?’라고 물었을 때까지도 나는 수영이 준 꾸러미를 손에 들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수영의 그림을 그때까지 왜 펼쳐 보지 않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막연히 두려웠던 것일수도 있었다. 수영의 마음이 어떤지, 내게 무슨 메시지를 보낸 것인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막막하고 혼란스웠다. 조수석에 내내 싣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풀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평온하기 짝이 없는 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서투른 손놀림으로 노끈의 매듭을 풀었다.
먼저 캔버스를 싼 빛바랜 신문지를 사방으로 펼친 후 한번 뒤집자 꼼꼼하게 채색을 한 유화 그림이 나왔다.
숨을 들이쉬고 마시는 소리까지도 또렷하게 들릴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윤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 굉장하네요.
그것은 수영이 그린 게 분명하되, 그가 그렸다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정교한 인물화였다.
여자아이 하나가 발목까지 잠기는 맑은 물속에 서 있었다.
그림의 전면에는 등을 돌리고 선 뒷모습이 보였다.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수면에 비쳐 보였다.
바닥의 조약돌이 투명하게 보이는 물살의 표면이 가볍게 일렁거렸다. 여자아이의 등 너머로 하늘과 바다와 맞닿은 수평선에는 흰구름이 떠 있었다.
그 장소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언니의 신혼집에서 멀지 않아서 산책을 나갈때면 자주 찾아가던, 서귀포 해안가 용천수가 솟아나는 샘물이었다. 부스스한 긴 머리의 여자아이도 누굴 그렸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수영의 마음을 내내 괴롭히고 있었던 나라는 것을.
푸른색 물감에 흰색과 회색, 녹색을 더해지면서 바다에는 청회색과 청록색의 파도가 출렁거렸다. 노란 태양과 푸르스름한 하늘과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흰구름, 그리고 흑갈색 머리에 헐렁한 바바리코트를 입은 여자아이를 붓으로 그려낸 선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오른쪽 귀퉁이에 이제는 유명한 화가가 된 수영의 사인이 있었다.
난독증이 있는 수영이, 동서남북의 방향을 못 잡는 수영이, 오로지 그릴 수 있는 것이라곤 바다 표면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물거품뿐인 수영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통글자를 그림으로 외워서 글을 읽는 법을 배웠듯이 그림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외워서 재현한 걸까.
갑자기 내장 한구석이 저릿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보이는 대로 그릴 수가 없고 생각한 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 그를 알고 있었다. 남들이 수월하게 하는 일도 그에게는 쉽지 않았다. 어떻게 운전까지 하고 다니는지 몰랐다. 풍선처럼 부푼 그의 상체 근육처럼 아마도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리라.
처자식을 거느리고 멀쩡한 남자처럼 사느라 수영도 힘들 텐데.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힘을 내서 살아가고 그림을 그리는 걸까.
목구멍에 탁 걸려있던 묵직한 응어리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다.
- 저는 그림은 잘 모르지만… 정말로 멋지네요.
나직한 탄식이 섞인 윤의 조용한 말소리가 마치 꿈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아련하게 들렸다.
기계적인 몸짓으로 그림을 신문지로 다시 싸서는 계단을 올라갔다. 스태프가 사용하는 객실에서 창문을 연 채로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침대에 엎드렸다. 머릿속이 텅 빈 채로 잠깐 졸았던 것 같다.
오랜만에 엄마와 아빠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예전에 살던 집에서 엄마 아빠와 식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캠퍼스 커플로 사고를 쳐서 나를 낳았던 두 분은 지금의 나만큼이나 젊었다. 부모님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화제는 언제나처럼 방금 다녀왔거나 앞으로 떠날 여행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철없는 아이들처럼 사이가 좋은 부모님을 속으로 한심하게 여기면서 멀뚱하니 쳐다보았다.
잠의 경계에서 눈을 뜨고도 의식이 또렷해질 때까지 누운 채로 꿈의 여운에 젖어있었다. 이곳이 어디인가.잠시 혼란스럽다가 곧이어 현실 자각이 찾아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비통하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처럼 여전히 꼭 붙어서 사이좋게 여행을 다니는, 언제까지나 젊고 행복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윤이 알려준 게스트하우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갔다. 젊은 남자 스태프를 데리고 한창 요리를 하느라 바쁘던 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커다란 냄비에 스파게티 면을 삶고 샐러드를 만들며 요리하는 모습도 댄스 스텝을 밟는 것처럼 경쾌했다. 마치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감고 윤이 불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노래를 마음속으로 따라 불렀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고기잡이 집 한 채…….
어깨에 닿는 따스한 손길에 고개를 돌리니 미소를 따라서 부드럽게 주름이 잡히는 상냥한 얼굴이 보였다.
"이만 가서 자요."
테이블에 손을 짚고 일어나서 몽유병자처럼, 선 채로 걷다시피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오후의 햇볕 냄새가 풍기는 청결한 시트에 깊이 얼굴을 파묻은 채로 곧장 잠들었다.
의식이 툭 끊어졌다가 아침 햇살에 다시 이어지듯이 달콤한 잠이 푹신한 구름처럼 나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