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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Oct 27. 2024

10. 기억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포구 쪽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맨 팔에  떨어졌다. 앞머리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으나 초여름 제주도에는 시도 때도 비가 오므로 비 맞으면서 산책하는 것쯤 아무 일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쳐다본 수영의 눈.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바로 전에 있었던 일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지금껏 나는 수영의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앞머리가 눈을 가려서였고 지금은 캡모자의 긴 챙에 가려서였다. 실내에서도 수영은 모자를 벗지 않았다. 근육이 발달한 상체에 딱 맞는 스포츠 브랜드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그는 헬스장의 잘생긴 트레이너 같았다. 그가 지그시 언니를 바라보며 어깨에 손을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가고 나서 수영은 와이프와 아이들 앞에서 모자를 벗었을까. 아니면 잠자리에 들 무렵에야 벗을까.

그의 머리카락은 숱이 많았고 살짝 곱슬거렸다. 만지면 푸들을 쓰다듬을 때처럼 거칠거칠했다. 언니는 그의 머리를 안아 보았을까. 손갈퀴를 만들어서 그의 머리칼을 쓸어 보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         

그의 자취방 창문에는 여느 때처럼 빈틈없이 암막 커튼이 쳐 있다. 꼭 닫힌 창틈으로도 자동차 소리는 사정없이 밀고 들어온다. 나는 그를 껴안고 있다. 두 팔로 칭칭 감듯이. 봉제 인형과는 달리 따뜻한 피가 흐르는 육체의 느낌을 갈구한다. 가슴에 머리를 얹고 심장 소리를 듣는다. 록 언니에게 종종 그러했듯이.

내 부모님은 어느 한순간에 지우개로 지우듯 세상에서 사라졌다. 검은 나일론 한복을 입고 꼬박 며칠을 마룻바닥에 앉아서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써보아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화장장의 플라스틱 숫자 앞에 서서 온도를 알리는 액정을 보고 또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왜 나는 살아있는가. 왜 나의 심장은 멀쩡히 더운 피를 온몸에 퍼 나르고 있는가. 수시로 나를 안아주던 부모님은 왜 나처럼 살아있지 않는 건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건 무엇인가. 깜빡 잠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깨는 일이 되풀이될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장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의식을, 나의 존재를 지울 수만 있다면.

수영의 손이 내 바지를 벗겼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의 손길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놀라서 얼어붙었던 건지, 그의 체취를 맡으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했던 것인지 수영을 오해하게 만든 게 순전히 내 탓이라고 여겼던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그 행위를 내가 조금이라도 예상했거나 바랐던 건 아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생생한 꿈처럼 느껴지는 낯설고 불편한 장면이 눈앞에서 천천히 지나갔다. 살을 저미는 아픔만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란 걸 일깨워줄 뿐이었다. 낯설고 서투른 섹스는 불편하고 불안했다. 마치 공중화장실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로 사람들이 뻔히 쳐다보는 가운데서 볼일을 보는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 장면은 수시로 입체영화가 재생되는 것처럼 내 머릿속에 들러붙었다.

창틀에 오랫동안 쌓인 먼지처럼 고왔던 그와 나 사이의 유대감은 한순간에 훅 날아가 버렸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수영의 얼굴을 도저히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수영이 보이면 멀찌감치 피해 갔다. 어쩌다가 그를 딱 마주치면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수영이 갑자기 학교에서 모습을 감춘 시기는 정확히 그 무렵이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학과장에게  불려 간  뒤로 용기를 내서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도어록은  짐작이 가는 번호를 아무리 눌러봐도 풀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줄곧 수영을 원망했었다. 나는 그저 온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가 내 바지를 벗겼다는 이유로. 수영도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은 눈감고 귀 막은 채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버티고 버티려고 애썼던 학교에서 졸업을 포기하고 마침내는 종적을 감춘 게 나 때문이었다는 걸 아예 모르지는 않았으면서도.

답답한 기숙사 방의 룸메이트보다 수영이 편하다는 이유로 그의 자취방에 아무 때나 들락거렸던 나에게, 내 기분대로 그의 침대로 들어가서 그를 껴안고도 그날의 일에 내 책임이 있단 걸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상황을 편집하고 그를 미워하는 마음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밤바다에는 어선 한 척 없었다. 텅 빈 어둠뿐이었다. 그게 나았다. 수영이 제주도에서 사랑하는 와이프를 위해서 그렸을, 수없이 많이 아름다운 물거품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얼굴에 끈적거리는 빗물을 손으로 씻어 내렸다. 손바닥과 팔다리에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향기로운 내음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텅 빈 밤바다를 보면서 계속 걸었다. 어둡고 비가 와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 다행이었다.     

                                                                                          *          

의뢰받은 일을 마쳐야 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쇼핑몰 상세페이지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나 포토샵 편집 일이 가끔 들어왔다. 한 건에 몇만 원, 많아봤자 몇십만 원 정도였지만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자정 무렵까지 컴퓨터 앞에서 단순 작업을 하고 나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언니와 수영이 호주로 가버릴 때까지 일만 하는 게 나을 듯도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의뢰 건들을 꼼꼼히 둘러보면서 머릿속이 텅 빌 때까지 기다렸다. 평소 같았으면 쳐다도 안 봤을 일감들까지 일일이 성의가 넘치는 답변을 달았다.

불을 끄고 눕자 록 언니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이 뚜렷해졌다.

나는 이 집에서 나가야 했다. 언니와 수영이 깨가 쏟아지는 신혼살림을 차렸던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아파트에서, 신혼부부가 사용했던 이 침대에서 나가야 했다.

다시 돌아올 생각도 있냐고 물었을 때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귀국하더라도 아이들도 있으니 마당 딸린 단독주택을 얻을 것 같다고.

그렇다면 여기를 그대로 놔둘 이유가 없었다. 수영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대학 때 리포트  몇 장 써준 것 갖고 나에게 집을 내줄 이유는 없었다. 록 언니에게도 나는 다 자란 사촌동생일 뿐이었다.

                                                                                          *         

잠이 오지 않아서 거실로 나와 창밖으로 보이는 밤바다를 쳐다보았다. 빗방울이 스쳐서 유리는 얼룩덜룩했고 텅 빈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구슬로 장식된 샹들리에 불빛은 은은했고 우아한 가구들로 잘 꾸며진 실내는 아늑했다. 어두운 밤바다와 불빛으로 가득한 실내 풍경이 한 장의 유리창에 정확히 겹쳤다. 내가 사는 언니의 아파트 거실은 어두운 밤바다에 떠 있었다. 

과거는 내가 모르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현재도 시시각각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그 옛날 록 언니는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주었다. 어렸을 때는 나를 안아주었고 다 커서 독립하고 나서도 신혼집을 내주었다. 그러니까 불평할 거 하나 없었다. 내 과거는 내 문제였고 내 감정도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수영을 탓할 일도 없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어둠이 내리는 운동장을 보면서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눴던가. 우리는 나눌 것이 없었다.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해결할 수 없는 각자의 문제들을 안고 있을 뿐.

수영은 나와 떨어져 있던 시간에 혼자서 번데기로 변했다가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가 되었다. 그에게 어떻게 나를 두고 너 혼자서 날아다니느냐고 원망할 것인가. 그럴 순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빛이 나는 수영과 언니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언제까지나 녹지 않는 커다란 덩어리가 가슴속에  걸려있는 것 같아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어두운 밤바다 속 깊은 곳에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도록 납작 엎드려 숨고 싶었다.

모자와 노트북만 챙겨서 집을 나왔다. 뒷좌석을 편평하게 펼 수 있는 SUV 트렁크에는 피크닉 매트와 침낭이 있었다.

범섬이 보이는 바닷가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어두운 공터에서 누르스름한 형체가 움직였다. 고양이인가 하고 자세히 살펴봤더니 귀가 뾰족한 개들이었다. 강아지 티를 벗지 못한 누런 유기견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듯 거친 풀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인적 없는  산책로를 따라 색색의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자동차 불빛을 발견한 강아지들이 내 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뒷좌석 유리창 하나를 조금만 열어두고 차 안에 드러누웠다. 갯바위로 몰아쳤다가 물러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차 안에 있어도 불편한데 축축한 잡초뿐인 공터에 있는 강아지들은 잠이 올까. 쟤들은 뭘 먹고살까. 계속 둘이 어울려 다닐까.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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