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인데 집 보러 가도 되나요?
- 저, 설날에 죄송하지만 집 좀 볼 수 있을까요?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보냈다. 미친 사람 취급하며 씹으면 어떡하지?
괜찮아. 한 번 욕먹고 말지. 모르는 사람인데 뭘.
그런데 바로 답이 왔다.
- 가능합니다. 지금 오세요.
헐. 된단 말이지!
진흙과 검불이 덕지덕지 붙은 등산화에 등산복을 입은 채 안도했다.
- 20~30분 후 도착해요. 감사합니다!
네비로 찍어본 집 위치는 5.6km,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등산복 잠바와 바지를 벗고 겹겹이 껴입은 이너티, 기모 레깅스도 벗었다.
까슬까슬하고 갑갑한 합성섬유에서 해방된 맨살에 한기가 몰려왔다.
편안한 기모 운동복 상하복으로 갈아입고 헐렁한 뽀글이 점퍼를 걸쳤다. 배낭에 쑤셔 넣어온 텐트가 잘 마르도록 거실에 펼쳐놓고 집을 나섰다.
중산간 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양옆으로 난대림이 무성하게 우거진 완만한 오르막길을 올라가서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다.
귤밭 한가운데 위치한 널따란 카페 주차장은 차를 열 대 정도 세울 수 있는 공터였다.
탁 트인 잔디밭에 밝은 분위기의 카페가 있었고 나무 울타리를 두른 옆집은 그림처럼 근사한 목조주택이었다.
내가 보러 온 집은 목조주택 마당 안에 있는 별채였다.
긴 털이 탐스러운 보더콜리가 마당 안을 껑충겅충 뛰어다녔다.
먼저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키 큰 주인아저씨가 그들을 배웅하면서 나를 맞이했다.
인터넷에 매물을 내놓자마자 문의가 잇따랐지만 다녀간 사람들이 에어비엔비나 펜션을 하겠다고 해서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자그마한 오두막집은 귀엽기도 했고 생뚱맞아 보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이 그림을 그린 다음에 나무로 손쉽게 척척 지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데크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내는 아늑했다.
견고한 유리창 창틀마다 딱 맞는 맞춤 커튼이 있었다.
밝은 메이플 원목 바닥에 벽과 천장은 흰색이었고 집주인 목수아저씨가 원목으로 직접 만든 식탁과 서가, 침대가 있었다.
주인아저씨가 집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나는 평생 대도시 아파트에서만 살았고 목조주택은커녕 콘크리트 단독주택에도 살아본 적이 없었다.
한적한 서귀포 중산간 귤밭 한가운데 오두막집에 사는 게 어떻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당장 계약하겠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고 샤워를 한 후, 주인아저씨에게 오전 시간에 한 번 더 집을 보러 가도 되냐고 문자를 보냈다. 아침 햇살이 어느 정도 드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친절한 답 문자가 금세 도착했다.
문을 열어 둘 테니 언제든지 보고 가라고, 옆 카페에 들러서 커피도 마시고 카페 사장님과 이야기도 나눠보라면서.
뽀송뽀송하게 마른 텐트를 걷어서 파우치에 넣었다.
그 전날 섣달그믐 밤에 백패킹을 하고 내려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전날 백패킹 갔던 기억이 꿈처럼 아득했다.
동호회 회원 다섯 명이 박배낭을 짊어지고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동쪽 오름 꼭대기에 옹기종기 텐트를 쳤다. 거센 바람과 싸우며 팩을 박고 나일론 줄로 텐트를 고정했다. 얇은 쉘터는 바람에 날아갈 듯 흔들렸지만 삼겹살과 묵은 김치를 굽자 공기가 훈훈해졌다.
섣달그믐이라 다들 가족들과 전화로 안부를 나누는데 나는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습관처럼 휴대폰으로 부동산 매물을 훑어보았다.
제주도로 내려와 오피스텔에서 일 년간 살았으므로 다음에는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단독주택은 좀처럼 구하기 어려웠다.
멋진 타운하우스는 연세가 비싸기도 하거니와 커다란 이층 집에 혼자 살면 처량할 것 같았다.
집 주위를 가꾸면서 살아야 하는 농가주택은 관리를 못 할 게 뻔했다.
게으른 독신자에겐 오피스텔밖에 답이 없단 말인가.
방 두 개에 거실도 있는 오 층짜리 신축 오피스텔은 수도권보다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주차 공간도 충분하고 중문 상권 내에 있어서 편리했지만 편안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완벽한 곳은 없나보다며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부동산 카페의 서귀포 전원주택 임대 게시글에는 푸릇푸릇한 잔디밭이 딸린 자그마한 단층 목조주택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여기 어떠냐고 무심코 옆엣 분께 묻자, 대뜸 마음에 쏙 든다며 당장 자신이 계약해야겠다고 말했다.
- (급 당황) 네? 제가 먼저 봤잖아요!
- (능글맞은) 먼저 계약금 넣는 사람이 임자지!
- (열받은) 그런 게 어딨 어요!’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그분은 몇 달 전에도 알프스 산맥에서 사십여 일간이나 백패킹 여행을 했던 행동파였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였건만 비니를 눌러쓴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여전히 소년 같았다.
깊은 밤에 오름 꼭대기 바람에 날려갈 것처럼 들썩거리는 백패킹 텐트 안에 누워서 생각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당장 오름을 내려가자마자 그 뻔뻔한 할배보다 내가 먼저 오두막집을 보러 가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