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혼자서 이사하기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지내기

by 유랑

직접 이삿짐을 싸서 날라 본 것은 대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도시에 살던 수십 년간 포장이사를 했지만 일 년 전 제주로 내려올 때 대부분의 짐을 정리했다.


차 한 대에 간단한 살림살이와 책, 옷가지만 싣고 제주에 왔다. 그 사이에 짐이 또 많이 늘어나기는 했다. 그래도 이삿짐센터를 부르지 않고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는 언제 어디로든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가볍게 지내고 싶었다.




내 이삿짐은 이부자리와 커튼, 사계절 옷들과 백패킹 용품, 트래킹화와 등산화와 릿지화, 골프채, 책 삼사십 권, 식기와 식료품, 간이 책상과 안락의자와 식탁의자 두 개, 그리고 50인치 티브이와 거실장이었다.


주인아저씨는 비어있는 집이므로 언제라도 짐을 갖다 놓거나 드나들어도 된다고 말했다. 티브이와 거실장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나머지는 조금씩 나르면 될 것 같았다.


하루종일 아무런 할 일도 없던 날, 책과 옷과 잡동사니를 싸서 오두막집에 들렀다.

가져온 걸레를 빨아서 바닥과 테이블과 선반을 깨끗이 닦은 후에 현관 입구 나무 서가에 책을 가지런히 꽂았다. 드레스룸에 행거를 조립해서 세우고 옷도 일부는 걸어놓고 티셔츠나 바지 등은 잘 개어서 사방의 선반에 올려놓았다.


집 계약하고 열흘 만에 이사하기로 했으므로 여유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다.

오두막집은 침대와 소파와 식탁이 갖춰진 풀옵션이었지만 그전에 살던 이십 오평 오피스텔은 풀옵션이 아니었다.

제주 내려와서 새로 산 침대와 소파와 식탁과 전자레인지를 새로운 세입자분께 넘기기로 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답이 없었다.


이런저런 걱정에 잠 못 들던 새벽에 가구 사진을 찍어서 당근마켓에 올렸다.

가구들은 새것처럼 깨끗했고 구입했던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올렸으므로 다음 날부터 문의가 쇄도했다.

문제는 배달이었다.

침대나 소파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 나도 몰랐고 중고로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몰랐다.

집을 비워줘야 할 날은 다가오는데 하루종일 당근마켓 문의에 응답하느라 바빴다.

침대나 소파 배달이나 해체는 안되고 직접 와서 알아서 가져가야 한다고.


짜증 나고 지칠 무렵 세입자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식탁은 이미 팔렸지만 그 때라도 나타나주신 게 다행이었다. 그분은 식탁이 팔렸다는 사실에 몹시 아쉬워하며 나머지 물품대금을 바로 입금했다.


내 물건 중에 귀중한 거라곤 거의 없었다.

지인 권유로 큰맘 먹고 산 골프채가 그나마 비싼 거였고 그 외엔 백만 원 넘는 물건이라곤 노트북밖에 없었다. 백패킹 배낭은 중고로 샀고 이케아 가구에 잡동사니는 모조리 다이소에서 사들인 것이었다.

드라이기도 오천 원짜리 다이소제였다. 요즘엔 소문이 자자한 다이슨 헤어드라이기를 쓰면 개털처럼 부스스한 머리카락도 촤르르 윤기가 난다던데, 침실에 마샬 스피커가 있으면 그렇게 분위기가 끝내준다던데 그런 건 떠돌이가 갖고 다닐만한 게 아니었다.


이삿날 전에 물건들을 죄다 오두막집에 옮겨놓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부자리나 식료품, 식기는 마지막 날까지 사용해야 했다. 커튼도 티브이도 없는 오피스텔에 휑하니 있기 싫었다.

그냥 이삿날 닥쳐서 부지런히 두세 번 오가며 옮기기로 했다.


오십 인치 티브이와 거실장을 옮길 일이 좀 걱정이었다.

오피스텔 이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까지 갖고 가서 차에 실어야 하는데 내 몸무게가 오십 킬로그램 정도니까 아마도 이삼십 킬로그램 짜리 물건쯤은 거뜬히 들고 나를 수 있겠지?

오두막집까지 차를 몰고 가면 울타리 밖에 주차하고 티브이와 거실장을 들고 잔디밭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것도 할 수 있겠지?


힘든 거야 어떻게 될 거 같은데 내가 쩔쩔매는 꼴을 보고 다른 사람이 그냥 지나치기 미안해할까 봐 걱정이었다.

제주 와서 알게 된 트래킹 동호회 지인들에게 말해볼까도 싶었지만 차라리 이삿짐센터에 요청하면 했지 아쉬운 소리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사 당일 날 나를 도와준 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지인이었다.

그 며칠 전에 다른 일로 만났다가 이사한다는 걸 알고나서 도와주었다. 그런 부탁을 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정작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제주에서는 그런 인연들이 드물지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다가도 갑자기 확 가까워지거나 속마음 털어놓는 일도 있었다.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오름에서 백패킹을 할 때면 아낌없이 도움을 주고받았고 일정 끝나면 바로 해산했다.

이사 도와준 분과도 그 후에는 연락이 뜸해졌지만 이사 마치고 나서 바다 전망이 근사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산 걸로, 그리고 내가 무척 고마워했던 걸로 충분하리라.




계획했던 대로 이사를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마친 것은 아니지만 거의 혼자 다 해내고 나자 후련했다.

오두막집 안의 조명을 환하게 밝혀놓고 난방을 올린 후 첫날밤을 맞이했다.

다음 날, 낯선 환경에서 무섭지 않았냐는 집주인의 안부 문자에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전혀요. 편안히 잘 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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