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트래킹

무거운 존재를 벗고 가벼워지기

by 유랑

시끄럽게 울려대는 휴대폰 알람을 끄고 딱 일 분만 누워있어야지, 하고 몇 번째일지 모를 알람을 끄고 또 끈다.

마침내 일어난 시각은 어김없이 여덟 시 반. 또 망했다.

아침부터 열이 나서 못 간다고 할까. 코로나 변종 오미크론이 유행하므로 열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게임 오버다.

하지만 나는 계획적인 성격이고 약속 어기는 걸 무척 싫어한다.




전날 배낭을 챙겨놓고 입을 옷도 내놨으므로 세수하고 선크림만 바르고 후딱 튀어나가기만 하면 됐다.

날이 더워서 반팔티에 통풍이 잘 되는 여름 등산바지를 입고 등산모자를 썼다.

보온병에 아메리카노와 얼음을 집어넣고 커피를 내릴 시간이 없어서 차에서 마실 아침식사용 쿨피스를 텀블러 가득 따랐다.

배낭에는 간이의자, 아이스커피, 과자 한 봉지, 베이글 두 개, 즉석 호박죽 한 개를 넣었다.


눈 뜨고 십 분 만에 나와서 차에 시동을 걸고 제주의 고속도로 평화로를 타고 달렸다.

트래킹 매너는 암묵적으로 십 분 전에 도착해야 한다. 출발시간 오 분 전에 겨우 도착했다.


동호회장인 쎈언니가 일찍 왔네, 하면서 시크하게 반겨주었다. 평소처럼 내가 몇 분 늦을 거라 말해놨다며.

회원 다섯 명은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출발점으로 이동했다.


제주 트래킹 모임에서는 기본적으로 ‘양방주차’라는 걸 한다.

관광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오름들은 대부분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없다. 트래커들의 속성상 한 번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원점회귀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단 자가용을 몰고 와서 모조리 종료 지점에 다 모인 다음에 최소한의 차량만 동원해서 출발 지점으로 가는 것이다.

트래킹을 다 마치고 나면 종료 지점에 세워둔 차를 얻어타고 시작 지점에 세워둔 차를 찾으러 간다.


이 날 트래킹은 애월 광령리의 천아오름 둘레길.


오전 열 시에 출발해서 조릿대가 우거진 푹신한 숲길을 십 킬로미터 정도 가볍게 걸었다.

칠월 한 달 내내 지겹도록 비가 내리더니 편백나무줄기에 연초록색으로 빛나는 이끼는 푹신한 융단처럼 두터웠다. 군데군데 희고 노란 버섯이 한 움큼씩 탐스럽게 돋아나 있었다.


트래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당연하게도 시원한 봄가을이다. 제주는 그리 춥지 않으므로 겨울철도 나쁘지 않았다. 눈이 많이 내려서 설경이 아주 멋진 데다가 빠르게 걷다 보면 땀이 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덥고 습한 여름은 걷기에는 영 별로였다. 특히나 해안 올레길은 땡볕이라 강렬한 햇살이 레이저처럼 지져대며 피부를 태웠다.


제주에 내려온 첫해인 작년에는 트래킹을 무척 열심히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 가리지 않고 쏘다녔다.

덕분에 비바람이 치는 바다를 보며 해안길을 철벅대며 걷다 보면 얼마나 많은 감상에 젖는지, 함박눈이 내리는 날 백패킹 텐트에서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들면 비몽사몽 하는 밤이 얼마나 스릴 있는지 안다.


2년 차인 올해는 트래킹이 좀 시들해졌다.

한라산 등반 다섯 개 코스는 각각 두세 번 이상 갔고 스물여덟 코스 올레길도 두 번 이상 완주했으며 한라산 둘레길 아홉 코스도 두세 번씩 걸었고 오름은 이백 개 이상 다녀왔다.


제주는 하늘이 무척 아름다우므로 같은 곳엘 가도 매일매일 풍경이 달라 보였다.

계절마다 피는 꽃도 달랐고 우거진 풀도 달랐다. 그렇지만 한여름에 땡볕에서 계곡 바위를 타다가 열사병으로 쓰러질 뻔한 이후부터 여름철에는 가급적 무리한 코스는 피했다.

천아오름 둘레길은 더위에 취약한 내가 걷기에 아주 적당한 코스였다.


광복절 전인데도 말복이 지나자 여름이 끝나는 기색이 엿보였다.

해가 지면 기온이 내려가고 풀벌레 소리가 한층 요란해졌다.

키 큰 편백나무 사이로 허리까지 오는 조릿대가 무성하고 바위마다 두텁게 올라온 이끼에 나무줄기를 칭칭 감아 오른 콩짜개 넝쿨까지 초록 숲은 생동감이 넘쳤다. 바로 눈앞에서 녹색 모자를 쓴 숲 요정이 튀어나와도 여긴 원래 그런갑다 여길 것만 같았다.

온몸을 연둣빛으로 물들일 듯 무성한 식물들은 원시적인 생명력으로 충만했다. 나뭇잎 사이로 한 뼘도 안 되는 하늘이 보일 때마다 햇빛이 수직으로 폭포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숲 속 빈터에 접이식 의자를 펴고 둘러앉아서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과일과 김밥과 손수 담근 열무김치를 싸 온 분들에 비해 내 도시락은 초라했다.

냉장고에 있던 베이글과 편의점표 즉석죽, 과자와 커피뿐이었으니까.


그래도 숲속에서 먹는 호박죽은 나쁘지 않았고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돌리자 다들 내 베이글과 과자를 탐냈다. 달고나를 입힌 누네띠네 파이가 아메리카노에 곁들이기에 그만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대충 설렁설렁 걷고 끝날 줄 알았는데 길잡이를 섰던 동호회장 쎈언니가 발을 멈추고 ‘여기 한번 내려가볼까요?’라고 의견을 물었다.

길 아래쪽은 계곡이었다. 꽤나 가팔랐지만 작은 나무를 붙잡고 조심하면 내려갈 만해 보였다.


어차피 놀러 나온 길이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 사람씩 양손으로 나무를 옮겨 잡으며 먼저 내려간 사람이 알려주는 대로 오른발 왼발을 딛으며 조심해서 내려갔다.


그곳에는 과연 어마어마한 절경이 있었다.

제주의 계곡은 용암이 흐르던 동굴이 무너져 내린 지형인 곳이 많았는데 가끔 엄청난 크기의 궤(바위굴)가 있었다.


고요한 숲속에 나타난 바위 절벽과 동굴, 그리고 빗물이 고여서 만들어진 초록빛 잔잔한 못은 신선들이 노닐던 자리 같았다.

잔잔한 물살이 이는 초록빛 물은 맑았고 한가운데는 어른 키 높이 정도 깊이로 보였다.

바쁜 일도 없으니 차 한잔 더 마시고 쉬어가기고 했다.

등산화를 벗고 바위에 앉아서 발장구를 치는데 한 분이 그냥 첨벙 물에 들어가 버렸다.

환갑 넘은 여자분이 어린애처럼 개구리헤엄으로 신나게 못을 가로질렀다. 여름 등산복은 물기만 털면 바로 마른다면서.


물기를 털고 다시금 나뭇가지를 붙잡고 올라와 종착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오후 두 시쯤이었다.


오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서 잡동사니 몇 가지를 사고 도서관에도 들렀다.

집에 가서 씻고 저녁에는 느긋하게 누워서 책을 읽었다.


집에 일찍 들어온 날이면 하루에 책 한 권을 거의 다 읽고 새벽 두 시경에야 잠자리에 든다.

제주 1년 차 때는 날마다 트래킹 나가느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올해 내려오신 분이 내가 제주 내려온 지 오래된 사람 같다며 작년에 내려왔다고 하자 깜짝 놀랐다.

작년에 나도 여기 사는 분들은 육지 티를 다 벗고 제주에 동화된 것처럼 보였다.


제주에 있으면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나무꾼처럼 시간이 잘도 간다. 육지에서 보낸 세월이, 지나간 과거가 마치 꿈만 같다.




제주의 지금 이 순간이 좋다.

해가 쨍쨍하다가도 바가지로 들이붓듯 비가 퍼붓고, 소나기 오는 낌새 눈치챈 마당개가 졸졸 따라 들어와서 현관에 벌러덩 드러눕는 오두막집이, 짙푸른 녹음 속을 하루종일 걷다가 고인 빗물 웅덩이에서 물장구도 치고 돌아와 밤늦도록 책을 읽으며 가벼워지는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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